동학농민운동이 외세에 의해 진압된 뒤,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이 처형되자 도통은 손병희(孫秉熙)에게 전수되었다.
손병희는 초기에 정치와 종교 간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일제에 의해 역이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걸고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 새로운 교리와 체제를 확립하였다.
1898년 4월 5일 최시형이 붙잡혀 6월 2일 순교한 뒤, 손병희는 사태를 수습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관헌의 추적이 심하자 1901년 3월 일본으로 피신했고, 그 해 9월 일시 귀국했다가 ‘세계의 대세’를 깨닫기 위해 1902년 3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 망명중이던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유하여 새로운 인식을 얻는 한편, 국내와 연락하면서 교인들을 규합, 동학을 재정비하였다. 손병희의 도일과 일본 체류로 인하여 사상적 폭이 넓어지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이 증대된 반면,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동학교도들의 민족적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1904년 8월 말부터 전국에 걸쳐 조직되기 시작한 진보회는 원래 동학교도들이 기존 정치체제의 개혁 세력으로서 참여하기 위한 기구였으나, 이용구(李容九)의 주도하에 송병준(宋秉畯)의 일진회(一進會)와 합하고 친일단체화하였다.
이에 손병희는 교정일치론(敎政一致論)을 철회하고 정치적 관심을 포기, 종교로서의 동학을 고수하는 방침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듬해 1월 귀국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는 데 착수했으며,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새로운 교단조직을 만들었다.
서울에 중앙총본부를 두고 대도주(大道主)가 다스렸으며, 지방은 72개 대교구로 분할, 교령(敎領)이 관할하게 하였다. 정당활동을 금지하여 이용구 등 60여 명을 출교시키는 한편, 교리·교체(敎體)·교제(敎制)·오관(五款: 呪文·淸水·侍日·誠米·祈禱)를 제정하는 등 교단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또한 인쇄소인 보문사(普文社)를 창설한 후 수많은 교서를 발간하여 동학 이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고, 1910년부터 포교활동과 더불어 출판교육 등의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교세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두어 교리와 서양의 학술을 가르치고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발간하여 국민들의 사회교육을 통한 민족정신 함양에 노력한 결과 천도교는 1919년의 3·1운동 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손병희를 비롯한 많은 교도들이 옥고를 치르고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나, 일제의 정책이 문화정치로 바뀌는 것을 이용하여 1919년 9월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설립하였고, 1920년 3월에는 이를 천도교청년회로 개편하여 전국 지부를 결성하였다.
그 해 6월부터는 『개벽(開闢)』이라는 종합잡지를 발행하고, 이어 『신여성』·『학생』·『어린이』 등의 월간잡지도 간행하였다. 『개벽』은 일제의 탄압으로 1926년 8월 통권 72호를 간행하면서 폐간되기까지 천도교 교리를 통하여 민중의 주체적 자각과 근대 문물을 섭취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23년에는 천도교청년회의 조직과 명칭을 개편하여 천도교청년당을 창립하고 학술연구부를 두어 『자수대학강의(自修大學講義)』를 발행, 다방면에 걸친 대학 교양 과정을 지면 강의함으로써 한국 청년의 지적 향상을 꾀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21년에는 교회의 체제를 중의제(衆議制)로 변경하였다. 1922년 5월 손병희의 사망과 더불어 이러한 혁신운동은 분쟁을 일으켜 중의제를 주장하는 신파와 보수파인 구파로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박인호(朴寅浩)를 교주로 인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를 인정하는 교인대회파(敎人大會派)와 부정하는 중앙종리원파(中央宗理院派) 및 통일기성회파(統一期成會派)가 대립, 1926년에 교인대회파와 통일기성회파가 타협하여 중앙종리원으로 개칭함으로써 신구 중앙종리원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구파 종리원에서 교인대회파가 다시 분리되어 사리원(沙里院) 중앙총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교세 확장과 교도의 단합을 위한 움직임도 일어나 1931년에는 신파측의 천도교청년당과 구파측의 천도교청년동맹이 합쳐 천도교청우당이 발족되었으며, 1932년에 500호를 1포(包)로 하고 포의 구성을 5단계의 세포조직으로 하는 교회조직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1934년에는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천도교오심당사건이 일어나 230명이 검거되었고, 1937년에는 천도교청우당이 해체당하는 등 일제의 계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광복 후에는 남북간의 내왕이 불편하게 되어 32만 5000호에 달하는 북한지역 교도들과의 연락이 원활하지 못했고, 반공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많은 북한 교도들이 검거되었다. 1948년에는 남한지역에서 신구파가 합동된 반면 북한지역에서는 연원제가 폐지되어 교회활동이 위축되었다.
1953년 서울 수복 후에 중앙총부를 서울로 옮겼으며, 1961년에는 최시형과 손병희의 법설(法說)이 포함된 『천도교경전』을 간행하였다. 현재의 수운회관(水雲會館)은 1972년 준공된 것으로, 천도교의 상징적인 건물로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동학은 1880년대의 조선사회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한 결과 당시의 지배 사상이었던 성리학을 통해 교리를 합리화하려고 하였다. 이어 1890년대에는 서양 문물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교리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러나 또 다른 경향이 1893년의 상소문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유교·불교·선교의 사상을 종합, 통일한 것으로 동학의 종지를 파악하려는 견해이다. 1905년 서학에 대한 대항적인 명칭으로서의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되면서 사상적인 노선은 바로 유불선의 종합을 지향하는 방향이었다.
이러한 천도교사상의 기점은 1898년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제3대 교주 손병희가 실질적으로 동학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손병희를 정점으로 하는 천도교 지도층의 이념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각세진경(覺世眞經)』·『도결(道訣)』·『삼전론(三戰論)』·『천도태원경(天道太元經)』·『무체법경(無體法經)』 등 한문체의 글과 <몽중문답가>·<무하사>·<권도문> 등 국문체의 글로 손병희의 저술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또한 1907년에 발행된 양한묵(梁漢默)의 『동경연의(東經演義)』는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저술로 천도교 교리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책이며, 1910년 8월부터 간행된 『천도교회월보』도 당시의 사상적 동향을 알아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각세진경』과 『도결』은 동학에서 천도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교리 변천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초기의 ‘시천주(侍天主)’라는 표현이 ‘시천’으로 바뀌어 있는데, 인격적이고 의지적인 신의 성격에 변화가 야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월적이고 인간 외재적인 신이 아니라 내재적이며 이미 인간 속에 갖추고 있는 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각세진경』에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삼재(三才)라고 하여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보고, 이를 일기의 조화[一氣之造化]라고 했는데, 이는 곧 하늘의 조화를 뜻한다.
하늘은 음양의 변화가 유래하는 근원이며 만물의 생성을 설명하는 원리를 뜻하는 것으로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천주라는 표현을 피하고 천(天)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더욱 촉진되어 그에 따라 논증도 더욱 치밀해졌다.
1905년을 전후해서 나타난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는 ‘인시천인(人是天人)’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내천(人乃天)’이라는 표현이 거의 확립되어 있다.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깨달으면 그 몸이 곧 하늘이고 그 마음이 곧 하늘이다.
그러므로 하늘을 모신다는 것도 사실은 내 마음을 모시는 것이 되며,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다.”라는 대승불교의 삼계유심(三界唯心) 견해와 거의 다름이 없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순수한 마음, 즉 성(性)을 뜻하며, 이(理)와 연결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이가 천인 것이다.
『동경연의』에서는 “사람은 소분천(小分天)”이라고 했는데, 또한 사람은 부분적인 천으로 부분과 전체가 양적인 면에서는 다르지만 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이돈화(李敦化)가 『천도교회월보』에서 현실적인 인간은 천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인간의 본원은 순수한 천에 다름이 아니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 견해이다.
또한 백인옥(白仁玉)의 『인내천해(人乃天解)』에서도 인간의 성과 몸은 천에서 유래된 것으로 인간은 소분천이고 천은 대분천이므로 인내천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모든 기능은 천의 조화가 나타난 결과이므로 나타난 천[有形天]으로서 나타나기 이전의 천[無形天]과 대응된다.
천은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만물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인간이 천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도 인내천이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천도교의 중심 교리는 천도를 믿는 데 있고, 인간은 이 천도를 알고 순응하여 지상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천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며, 유일한 절대 원리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인간지상주의를 표방한다. 최제우(崔濟愚)는 이를 ‘인이시천(人以侍天)’·‘인즉천(人卽天)’이라 하였고, 손병희는 ‘인내천’이라고 표현하였다.
천도교는 내세에서가 아니라 현세에서의 지상천국 건설을 최고 이상으로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주관적으로는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여 정신 개벽을 이루고 객관적으로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 인간성 본연의 윤리적 사회를 이룩하여 세계의 신앙을 통일, 세계를 하나로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1965년에 확정된 천도교헌은 교회제도를 중의제로 하여 천도교전국대의원회를 교회의 최고의결기관으로 하고 있다. 대회에서는 도정·도훈·종의원의원·지방교구장·선도사를 대의원으로 구성하고, 정기대회는 교령이 소집한다.
중앙총부에는 자문기관인 현기사(玄機司), 집행기관인 종무원(宗務院), 의결기관인 종의원(宗議院), 감사기관인 감사원(監司院)이 있고, 종무원(宗務院)은 교회의 교무행정을 담당한다. 또한 연원회(淵源會)가 있어서 교인들을 연원의 상종관계로 결집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중앙총부는 서울에 위치해 있고 각 군에 교구, 각 면에 전교실(傳敎室)을 두고 그 밑에 부(部)라는 세포조직을 설치하고 있다. 천도교를 수도하는 데는 다섯 가지 요령이 있다. 첫째는 내시천주(內侍天主)이다. 마음속에 천주를 모시는 것이다.
사람은 근본에서 한울님의 소생이므로 한울님을 믿어야 하되 자기의 심령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으로, 자기의 심령을 키우는 것이 한울님과 접촉하는 수도라는 것이다. 둘째는 통령정기(通靈正氣)이다. 통령은 안으로 정신을 키워 한울님의 큰 영과 합일되는 것이고, 정기는 밖으로 육체의 기운을 키워 천지대의를 인간에게 펴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제화증복(除禍增福)이다.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키우는 것으로 인생의 가장 큰 복은 장생(長生)이라 하였다. 넷째는 포덕(布德)이다. 사람에게 천도교의 도를 널리 전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보국광제(輔國廣濟)이다. 나라를 돕고 세계 장생을 널리 건지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강령은 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의 다섯 가지 정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오관이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주문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이다. 청수는 매일 저녁 9시에 모시며 온 가족이 청수상 앞에 모여 기도를 올린다.
시일은 일요일마다 교당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 것이며, 성미는 한 술의 쌀로 천은에 보답하는 실행을 보이는 것이다. 수도 행위를 총칭하여 기도라고 하며, 심고(心告)·시일기도·특별기도 등으로 나누어진다.
천도교의 정기적 공동의례는 매주 일요일에 봉행되는 시일식(侍日式) 이외에도 교조의 득도와 승통기념일 및 운동기념일에 행하는 기념식이 있고, 개인 수행으로는 매일 밤 9시에 청수를 모시고 주문을 읽고 심고드리는 기도식이 있다.
각종 제례의식을 봉행할 때는 향아설위(向我設位)로 하는데, 이것은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 조상은 나를 통하여 나타난다고 보아 벽을 향해 제상을 차려 놓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차려 놓는 것을 말한다.
일제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던 천도교는 광복 이후 북한지역의 교세가 급격히 증가한 데 힘입어 1947년에 40여만 호에 달했으나 6·25전쟁으로 인한 교세의 쇠퇴를 수습하지 못하였고, 1963년에는 6만 호의 교세를 확보하는 데 그쳤으며, 현재에도 10만 호 정도로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교역자 양성기관의 결여와 재정 수입원의 협소함, 교직자제도의 문제점, 현대사회에 부적합한 의례제도 등에 따르는 것으로 천도교가 해결해야 하는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