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시대 ()

연천 전곡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
선사문화
개념
인류가 처음으로 나타난 시기부터 약 1만년 전에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기.
정의
인류가 처음으로 나타난 시기부터 약 1만년 전에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기.
개설

구석기시대 동안 고인류들은 채집과 사냥을 하고 살았으며 이동성생활을 하였던 시기이다. 인류사의 거의 99.8%가 구석기시대이다. 그런데, 인류는 약 7백만 년 전에 나타났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석기는 약 250만년 전의 것이다. 인류의 발생 직후에도 자연석이나 나무 등을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석기를 제작한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대의 침팬지들도 도구의 사용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결국 석기시대라고 하는 시기는 250만년 전에서 홍적세에 정착생활이 시작되는 1만 2천년 전의 시기까지를 포함한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도 적어도 150만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하였으며 중국의 전 지역에서 그 흔적을 보이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이른 시기의 고인류의 화석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석기유적들이 한반도 전체에 널리 퍼져 있어서 홍적세 이른 시기에 고인류가 유입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홍적세의 한반도 환경

홍적세(Pleistocene)는 지구의 기후가 추워져서 빙하가 형성되었던 시기이며 흔히 빙하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 동안 빙하가 극지방과 높은 산악지대에 형성되고 주변 지역으로는 주빙하기후가 형성되었다. 빙하시대는 250만년 전에 시작되고 하부 홍적세(250만년∼73만년 전), 중부 홍적세(73만년∼12만 5천년 전) 그리고 상부 홍적세(12만 5천년∼1만 2천년 전)의 시기로 구분되며 이러한 시기들은 심해코어의 산소동위원소 변동에서 얻어진 기후변동 주기 상으로 MIS 단계로 구분된다. 오늘날의 따뜻한 시기도 간빙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빙하기 동안 바닷물은 증발하여 극지방과 산악지대에 얼음과 눈으로 남게 되어 해수면이 하강하게 된다. 한반도의 서해안은 낮은 대륙붕으로서 빙하기 동안은 많은 부분이 육지화 되고 대륙성기후로 변하였다. 그 대신 육지를 통해서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상의 이동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일부 고원지역에서 빙하가 발달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빙하의 발달은 없었다. 빙하기 동안 침엽수림과 초원이 확대되었으며 비교적 건조한 기후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홍적세 동안 어느 시기에는 상당히 온난한 기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상원 검은모루동굴과 같은 유적에서 보이는 원숭이, 물소 그리고 쌍코뿔소와 같은 아열대성 동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 같은 유적에서 삼문말[三門馬]같은 것들이 보이거나 큰사슴 등이 출현하는 것은 추운 시기에는 초원지나 한대림과 같은 식생이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빙하기에는 한반도의 동북지방에도 매머드가 출현하는데 기후가 상당히 한랭하였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주민의 기원

인류는 약 7백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2백만년 전 경에 초기 호모들이 유라시아대륙으로 퍼져 나왔다. 동아시아 지역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150만년 전에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반도에도 이른 시기에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했을 가능성이 많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는 6만년 전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대체로 3만 5천년 전 경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는 만달인, 승리산인, 상시인 등의 현생인류 화석들이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평안도 지역의 동굴유적에서 역포인이나 덕천인과 같은 현생인류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가 발견되고 있지만 아직도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석기유적의 연대가 오래된 것과는 괴리가 있다.

구석기유적의 분포와 특성

지난 1960년대 초에 북한의 굴포리 그리고 남한의 석장리유적이 발견된 이래 많은 수의 유적들이 발견되어 현재 200군데가 넘는 유적들이 전국적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지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남한 지역에서는 개발로 인하여 많은 유적들이 확인되었다. 동굴유적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 지역과 남한에서는 충청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의 석회암 지대에서 다수가 확인되었고 이들 동굴에서 고인류의 화석들과 고동물 화석들이 발견되어 한국 구석기 연구와 홍적세 환경 연구에 핵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야외 유적들은 크게 두 가지 종류의 퇴적구조에서 발견되는데, 하나는 강이나 해안의 단구면의 상부퇴적물에서 발견되는 경우와 사면붕적기원의 퇴적물 속에서 발견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장거리 풍성토인 뢰스퇴적으로 보이는 퇴적물 속에서도 석기공작들이 발견된다. 현재 한강이나 금강 등의 큰 수계를 따라서 많은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고 또한 호남지역의 영산강과 보성강 유역에서도 석기유적들이 집중되고 있다.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편년

석기공작의 편년은 주로 지질학적인 구조, 기후연관 퇴적학적인 사이클, 절대연대 그리고 석기공작의 양상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탄소연대측정 가능 범위 이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포타시움 아르곤 측정법, OSL법, ESR법, TL법, 화산재연대법, 알미늄 벨리움 동위원소법 등 다수의 과학적인 기법이 적용되고 있지만 각 연대측정법들에서 얻어진 결과가 상이하게 나타나는 경우나 적용 범위에 한계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 후기구석기공작의 연대에 대해서는 근래 AMS연대가 증가하여 세부적인 편년이 이루어지고 있다.

구석기시대는 흔히 전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러한 편년은 원래 석기의 기술적인 발전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반도의 구석기시대도 이러한 방법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중기구석기를 구분하는 일반적인 기준이 되는 르발르와 기법과 같은 사전조정타격법이 출현하지 않음으로써 전기와 중기의 구분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전기와 중기를 묶어서 편년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통 중기라고 구분하는 것은 대체로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되는 10만년 전에서 후기구석기시대의 돌날〔石刃〕석기공작이 출현하는 3만 5천년 전후한 시기까지의 석기공작들을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2만년 전이 되면 돌날석기공작도 대단히 발전하여 좀돌날〔細石刃〕석기공작이 나타나고 이러한 치밀한 석기제작 기술은 후기구석기 말엽까지 지속된다.

일반적으로 전기구석기시대라는 것은 찍개류나 주먹도끼와 같은 대형 몸돌석기〔石核石器〕들이 중심이 되는 석기공작들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한반도의 전·중기 구석기공작들을 제작한 가장 흔한 재료는 석영맥암과 다양한 질의 규암들이다. 이러한 단단하고 거친 석재의 성격은 이 지역 석기공작의 기술적 그리고 형태적인 패턴에 기본적인 전제가 되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석기공작으로 북한에서는 검은모루유적의 석기들을 1백만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유적에서도 주먹도끼를 비롯한 적은 수의 석기들이 발견되었지만 시기나 석기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반도에서 전기구석기로 흔히 거론되는 것들은 한탄강과 임진강의 석기공작들 중에서 시기가 앞서는 것들이다. 특히 전곡리의 하부층에서 나타나는 석기공작들은 전기구석기시대에 속하는 것들로서 주먹도끼를 비롯한 대형석기들이 포함된 것들이다. 그리고 같은 석기구성을 가진 공작들이 중부 지방과 남부 일부 유적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러한 석기공작들의 연대에 대해서 지점별로 그리고 학자들 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증거들을 토대로 가능한 시간적인 구분은 한반도에서 최초의 주민이 유입된 이래 후기구석기시대가 시작되는 3만 5천년 전까지의 시기를 전기와 중기의 통합시기로 본다.

한반도의 전기나 중기구석기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석기양상은 그 구성에서 주먹도끼, 찍개, 다각면원구 등의 대형 석기들과 다양한 단계의 큼직한 몸돌들이 많으며 성형석기의 비율이 그다지 크지 않고 또한 도구를 다듬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2차 가공으로서 기능을 하도록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도구의 종류에서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소형의 도구들이 제작상의 뚜렷한 특징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흔히 ‘임시응변적’ 석기공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기와 중기구석기공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석기형태는 주먹도끼류의 석기이다. 이 주먹도끼류의 석기는 흔히 아슐리안형의 석기공작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 전곡리유적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는데 아슐리안형의 다양한 양면가공의 주먹도끼들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어 당시까지 모비우스가 세운 세계 전기구석기 양대문화권 학설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슐리안공작은 197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주장되어, 동아시아 지역을 찍개문화권으로 구분하였지만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들 때문에 이 학설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의 보서〔百色〕유적이나 루오난〔洛南〕유적 등지에서 주먹도끼들이 새로이 발견되고 또한 과거에 발견된 구석기공작에 대한 재해석으로 이제는 동아시아에서도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문화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 중부 지역의 전기와 중기 구석기유적에서는 거의 주먹도끼류의 석기공작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기로 분류되는 석기공작과 중기로 분류되는 석기공작들의 구성이나 기술적인 변화는 뚜렷하지 않다. 현재 전기로 구분되는 석기공작들은 대체로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의 현무암 대지 위에서 발견되는 유적들이 다수 있고 또한 청원 만수리유적의 하부층에서 나타나는 석기공작을 전기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중기로 분류되는 석기공작들은 강의 제2단구면 상부에 퇴적된 사면붕적기원의 퇴적물이나 뢰스 등의 풍성퇴적물 속에서 발견되는 석기공작들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 김포나 파주 지역의 최하부층 암반 상면의 자갈층에서 발견되는 석기공작들은 현재 절대연대가 중기구석기시대의 범위에 있지만 그 시기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와 유사한 구조의 유적들은 나주의 당가유적과 같은 지점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구석기 시기구분과 내용

전기구석기

석기공작 기술로는 전기와 중기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지만 편의상 마지막 빙하기의 시작을 기준으로 본다면 대략 10만년 전까지의 석기공작을 전기라고 잠정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적인 범주에서 볼 때, 한반도의 구석기유적 중에서 전곡리 구석기유적의 석기공작은 전기를 대표한다. 주먹도끼를 비롯한 대형 성형석기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정형화되지 않은 소형석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곡리 이외에도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의 많은 석기공작 출토지점들 중에서 전기구석기공작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다수가 있다. 파주 지역에서는 장산리유적, 금파리유적, 주월리유적, 가월리유적 등이 있으며 연천 지역에서는 원당리유적, 장남교유적, 남계리유적, 횡산리유적 등이 거론된다. 이러한 유적들에서 발견되는 석기공작의 특성은 전곡리의 것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지점에 따라서 형성과정이나 시기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곡리유적의 경우에도 화산재분석과 OSL연대 그리고 뢰스퇴적구조 등의 분석을 통해서 볼 때, 상부에서 하부에 이르는 퇴적이 최상부에는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되는 석기공작이 있고 최하부층은 35만년 전 정도의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유적의 경우에도 시간으로 따지자면 일본에서 불려온 Aso4 또는 Ktz 화산재층의 아랫부분의 석기공작들이 시간적으로 전기의 범주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화산재의 연대가 대체로 9만년에서 10만년 전후의 시기를 반영한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층들과 비교될 수 있는 다른 유적들의 문화층들도 전기로 구분될 수 있다.

이 지역의 전기구석기유적에서는 주먹도끼들이 거의 모든 유적에서 발견된다. 이 지역의 주먹도끼류 석기들에는 가롯날도끼도 포함되어 있다. 주먹도끼는 찌르개형〔尖頭形〕과 타원형으로 크게 구분되지만 찌르개형으로 분류되는 것들 중에서 상당수는 몸통이 두텁고 끝이 강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흔히 피크라고 불리는 찌르개〔尖頭器〕에 속하는 것이 많다. 주먹도끼의 일반적인 제작기술은 천석이나 천석에서 떼어낸 큰 격지〔剝片〕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 보편적인데 직접타격에 의해 큼직하게 떼어낸 격지들의 흔적과 자연면이 크게 남아 있다. 그리고 몸통부위가 두텁거나 뒷굽부분이 대단히 두터워서 아슐리안 초기나 아프리카의 상고안에서 보이는 주먹도끼와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롯날도끼들은 전형적인 것은 극히 드물지만 날카로운 격지의 측면을 가공하여 자르는 날을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많은 수의 다각면원구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석기들은 그 자체의 용도도 있겠지만 격지를 만들기 위한 몸돌로서 기능이 있으며 박리작업의 방식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눠진다. 대체로 여러 방향에서 박리한 것이 보통이지만 집중타격면을 갖춘 경우도 많아서 이러한 집중타격면의 수효에 따라서 형태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구형의 정도도 달라서 대체로 완전한 구형인 것은 드물게 보인다.

남한의 중부 지역에서도 전기구석기로 지목된 지점들이 있는데 단양 금굴유적의 하부층과 수양개유적 제3지점, 미호천 지역의 오송 만수리유적 여러 지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초기에 발견된 석장리의 하부층도 전기로 거론되기도 하였지만 전기까지 오를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러한 지점들에서도 주먹도끼공작들이 출현하고 있고 석기공작의 기술적인 특성도 한탄강·임진강 유역의 것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단양 금굴유적의 하부층에서는 동물화석들과 공반하여 석기들이 출토되어 당시 환경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만수리유적에서는 여러 지점들에서 주먹도끼를 비롯한 원시적인 석기공작들이 발견되었다. 그 시기에 대해서는 측정된 절대연대의 차이가 워낙 커서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전기구석기에 편년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에 측정된 알미늄-벨리움 연대측정의 결과는 적어도 하부 문화층은 중부 홍적세의 전기로 올라갈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청원 지역의 두루봉유적의 동굴들에서는 다수의 동물뼈들과 화분들이 보고되었는데, 일부 지점은 중부 홍적세의 따뜻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서 보고된 인류의 흔적들이 상당히 오래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중기구석기

한반도에서는 르발르와기법이나 이와 유사한 발달된 사전조정박편제작기법이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구석기 전공자들에게 있어서 중기구석기시대로 흔히 구분하는 석기공작들은 시간적으로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된 시점에서 3만 5천년 사이의 석기공작들을 포함한다. 르발르와기법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고 대체로 내몽골 지역을 그 남방 하한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한반도와 중국 남부의 석기공작의 발달에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 요인으로 생각되고 있다. 일부 편년에서는 중기를 20만년 전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유럽의 르발르와기법의 출현을 토대로 주장되는 것이므로 현재의 동아시아 지역의 석기공작의 패턴으로 보아서는 의미가 없어서 임의의 시간을 전제로 중기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서 중기구석기로 분류되는 석기들은 실제로 전기구석기의 석기들과 구분이 어려운데 일부 학자들은 흔히 후기구석기층 아래에서 후기와 다른 석기공작이 발견되면 중기구석기로 보는 경향이 다분히 있다. 이러한 지질층서적인 편년은 많은 유적의 석기공작에 적용되었다. 보성 죽내리유적의 하층, 홍천 하화계리유적의 하층, 제천 명오리유적의 하층, 화천 상무룡리유적의 하층, 춘천 거두리와 갈둔유적, 홍천 일대의 여러 지점들, 평양 용곡동유적의 중층, 대전 용호동유적, 이천 삼리유적, 양평 병산리유적의 하층, 천안 두정동유적의 하층 등의 석기공작들이 중기구석기로 편년되었다. 이들 석기공작들은 대체로 전기로 분류된 석기공작과 거의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주먹도끼를 포함한 대형석기들이 특징적이며 제한된 가공으로 기능을 부여한 소형석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다양한 단계의 몸돌과 다각면원구의 존재는 이 시기에도 무가공의 격지를 널리 사용한 전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부 유적들 중에서 퇴적층의 최하부, 즉 암반의 상부에 바로 연속되는 사면붕적기원이나 사태로 인한 자갈층 또는 거친 모래층에서 자연석들과 함께 지형의 곡부에서 집중되어 나타나는 석기공작들이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파주 운정지구에 있는 다수의 유적들이나 김포 신곡과 장기 등의 유적들이 대표적이다. 이와 유사한 구조를 보이는 유적들은 금강유역의 송두리유적이나 나주의 당가유적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석기공작들을 상부층의 OSL연대나 AMS연대를 토대로 중기구석기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석기공작들의 특성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유적의 형성 과정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석기공작의 제작과 사용의 시기가 상당히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운정 지역의 유적들에서는 마모도가 다른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전 시대의 석기들을 재가공하여 사용한 경우들이 관찰된다.

후기구석기

일반적으로 좁고 측면이 날카로운 석인을 이용한 도구제작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며, 한반도에는 대체로 3만 5천년 전에 현생인류의 출현과 같은 시기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시아에 현생인류가 출현한 것은 중국 남부의 마바유적의 경우에 적어도 6만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데 한반도에서는 출현 시기를 단정할만한 화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알려진 최고의 현생인류는 17만년 전에 이디오피아의 호르타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현생인류는 몇 차례의 확산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로 6만년 전에서 4만년 전후의 시기에 전 세계 각지로 확산되었다고 믿어진다. 현생인류는 돌날석기공작의 제작, 사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는 돌날석기공작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지역적인 환경에 대한 기술적인 적응 과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후기구석기시대는 빙하가 최고로 발달한 시기에 해당되는데, 기후구분으로 MIS 3기와 MIS 2기의 시기에 해당된다. 빙하가 발달함에 따라 해수면은 하강하여 황해는 극성기에는 거의 육지화 되었고 해안선이 제주도의 훨씬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동해는 내륙호수로 남았던 시기가 있었으며, 한반도 주변 지역에서 인류나 동물의 이동이 쉬웠던 시기였다. 함경도 화대 장덕리유적에서는 매머드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 한반도는 상당히 추운 기후였고 초원지대가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돌날은 간접타격법 등의 발달된 박리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양측 면이 날카로운 것이 보통이다. 이 석기제작법은 석재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단위 석재 당 가장 많은 ‘사용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다. 이 돌날에 가압법으로 가공하여 기능적으로 분화된 정교한 석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후기구석기에는 석기뿐만 아니라 조각도를 이용하여 많은 뼈연모〔骨角器〕를 다듬고 있다. 후기구석기시대에는 고도의 박리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석재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쳐트(chert)와 같이 곱고 치밀한 밀도를 가진 석재들이 선호되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후기구석기시대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다수의 흑요석재는 상당거리 운반된 것이다.

한반도의 후기구석기공작들은 크게 두 가지의 다른 계통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치밀한 석재를 이용하여 제작된 돌날석기들이 포함된 석기공작들과 석영이나 규암제 등의 거친 석재를 활용하여 만든 전·중기 이래의 격지석기 중심의 석기공작이다. 물론 석기의 구성에서 소형화되고 2차 가공이 두드러지는 등의 변화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전통의 석기공작들이 있다. 이러한 두 계통의 석기공작은 지리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혼재하고 있다. 그러한 혼재 현상은 동아시아 지역의 후기구석기시대의 주민이동을 반영하는 것으로써 중국 남부 지역의 돌날없는석기〔無石刃石器〕공작을 가진 사람들이 북방에서 내려온 돌날석기공작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한반도 지역에서는 혼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후기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도구로서 긁개, 조각도, 부리형석기, 밀개 등의 소형석기들이 흔히 보이지만 가장 특징적인 석기로서 슴베찌르개〔有莖尖頭器〕를 들 수 있다. 이 석기는 아마도 중기구석기시대에 시작되어 후기구석기시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석기이며 후기구석기공작을 특징짓는 도구이다. 그리고 이 석기는 일본의 서부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이프형 석기의 조형으로 알려져 있다. 돌날몸돌으로는 쐐기형 몸돌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 중에서 마주보는 양끝에서 중심을 향해서 박리작업을 한 돌날몸돌들이 있어서 기술적으로 내몽골 지역과 연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후기구석기공작들은 1960년대 초에 발견된 석장리유적이 대표적이며 단양 수양개유적, 밀양의 고례리유적, 화천의 상무룡리유적, 순천 월평유적, 화순 신북유적, 홍천 하화계리유적, 굴포리유적의 상층 등, 전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후기구석기의 후반, 대체로 2만년 전에 이르게 되면 대단히 작고 정교한 돌날공작이 나타나는데 이를 좀돌날공작이라고 부른다. 좀돌날은 일종의 조합식 석기를 만드는 재료이며 전국적으로 나타난다. 대체로 좀돌날 제작은 크기가 작아서 나무 등의 기구에 끼워서 제작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좀돌날을 끼우기 위한 사전 조정작업들을 몸돌에서 볼 수 있는데, 쐐기형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원추형에 가까운 것도 보인다. 다양한 기술로 제작된 좀돌날이 나타나서 후기구석기시대의 말엽이나 신석기시대의 초엽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석기공작들은 대체로 후기구석기의 상층에서 발견되는데, 동해시 기곡유적, 철원 장흥리유적, 화천 상무룡리유적, 순천 월평유적, 화순 신북유적, 전라남도 송광면 곡천유적, 곡성 옥과유적, 화순 대전리유적, 홍천 하화계리 사둔과 작은 솔밭유적, 남양주 호평동유적, 북한의 만달리 동굴유적 등에서 발견된다. 남쪽으로는 부산 지역의 해운대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서 이 시기에는 이미 한반도 전역의 다양한 생태환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좀돌날공작 역시 중국의 북부 지역과 한반도, 연해주와 일본열도에서 연속되고 있지만 황하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돌날석기공작과 같이 시베리아-몽골 기원의 북방석기공작기술로 볼 수 있다.

후기구석기문화는 한반도의 전역에 퍼져 있는데, 그 당시에 황해의 많은 부분이 노출되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많은 유적은 바다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좀돌날석기공작은 후기구석기시대의 마지막 단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로 가압박리법으로 정교한 석기를 만드는 기법이 신석기시대 초기까지 지속된다. 그리고 후기구석기시대에 이미 갈아서 도끼를 만든 것이 보이는데 장흥리유적이나 신북유적에서 나오는 국부 간돌도끼〔磨製石斧〕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것은 기존에 신석기시대의 도구라고 생각하던 기술로 만든 석기들이 이미 후기구석기시대에 사용되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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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구석기문화』(최무장, 집문당, 1990)
『북한의 선사고고학 1-구석기시대와 문화-』(한창균, 백산문화, 1990)
『한국 구석기 연구의 길잡이』(손보기, 연세대학교출판부, 1988)
『한국 구석기문화 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조선의 구석기시대』(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77)
「우리의 구석기 연구 반세기」(이융조,『한국학보』81, 1995)
「전남의 구석기문화」(이기길,『동방학지』81, 1993)
「한국의 구석기문화」(박영철,『한국고고학보』28, 1992)
「구석기시대 연구사」(배기동,『국사관논총』19, 1990)
「북한 구석기문화 연구 현황」(최무장,『김정기박사화갑기념논총』,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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