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초기에 여진족 등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압록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북쪽 변경에 쌓은 장성.
건립경위
특히 성종~현종 대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은 북계 지역의 방어 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북 방면으로는 용주 · 철주, 안의진, 청새진, 그리고 지금의 의주인 위원진 · 인주 · 영덕진 등의 성을 쌓거나 보수하였고, 동북 방면에는 의주, 영평진, 요덕진, 상음현, 현덕진, 용진진 등의 성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였다.
그러므로 천리장성의 축조는 이렇게 쌓은 북쪽 변두리 땅의 성(城)과 진(鎭)을 토대로 하여 1033년(덕종 2)부터 이들 관방을 선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추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서북로의 송령(松嶺) 동쪽으로 장성을 쌓아 변방 적들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다.”라고 한 것이 그러한 점을 말해 준다. 요새지 거점에 대한 관방 시설만으로는 방어상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들 거점성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하나의 연결선으로 전면 보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변천
형태와 특징
북한 학계에서는 천리장성이 압록강 하구에서 평안북도 북쪽, 자강도 희천, 평안남도 북단을 지나 함경남도 금야군과 정평군의 동해에 이르는 약 630㎞이며, 4단계에 걸쳐 구축된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고려 사회가 정치적 · 외교적 · 제도적으로 안정을 기하면서 천리장성은 국경선의 기능, 혹은 문화권의 구분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동북 방면은 장성 밖으로 길주(吉州)까지 기미주(羈縻州)가 설치되어 있어 장성은 여진족과 혈통이 섞이는 것을 막고, 문화적 차이를 구분하려는 구분선과 같은 기능을 가졌다. 그러나 동북 여진 정벌 후 성이 여진에게 반환된 뒤로 천리장성은 국경선으로서의 의미도 갖게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논문
- 양시은, 「고려시대 전기 서북한지역의 관방체계」(『한국중세사연구』 64, 2021)
- 윤경진, 「고려 현종말~문종초 북계 주진 설치와 장성 축조」(『군사』 79, 2011)
- 신안식, 「고려시대 양계의 성곽과 그 특징」(『군사』 66, 2008)
- 신안식, 「고려 전기의 북방정책과 성곽체제」(『역사교육』 89, 2004)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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