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년(예종 2) 윤관(尹瓘, ?1111))과 오연총(吳延寵, 10551116)이 17만 군을 동원하여 여진족을 공격하여 몰아내고 공험진(公嶮鎭)을 포함한 6성을 개척하였다. 이듬해 추가로 다시 3성을 개척하고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徙民)을 실시하였다. 이때 윤관은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국경 경계비인 정계비를 세웠다.
『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동계에 “예종 2년(1107)에 윤관 · 오연총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을 설치하고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라는 기록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비의 건립 시기가 임언(林彦)이 윤관의 공적문을 작성하여 영주(英州)의 남청(南廳)에 걸었던 것과 같은 시기인 예종 3년(1108) 2월이라 하였다.
윤관의 정계비에 대해서는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경원도호부)에 “공험진의 선춘령은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비석 4면에는 모두 글자가 있었지만, 언제인가 오랑캐들〔胡人〕이 글자를 뭉개 버렸다. 뒷날 어떤 사람이 그 비석 뿌리를 파내 보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의 4자만 있었다.”라고 하였다.
현재 실물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정계비가 윤관 9성의 축성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윤관이 정계비를 세운 목적은 9성 축성 이후 여진과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목적과 고려군의 전공을 명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윤관 9성의 위치에 대해서 논자 간에 많은 견해차가 있다. 함흥평야 일대, 함북 길주 일대, 그리고 두만강 이북 등의 설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전개되었다.
한백겸(韓百謙)은 9성이 길주 이남에 있었고, 경계비가 마운령에 세워졌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이익(李瀷), 이종휘(李種徽) 등 실학자들은 두만강 이북설을 주장하였다. 김구진, 방동인, 이인철 등은 윤관의 비가 두만강 북쪽 7백 리에 위치한 선춘령에 있다고 한 견해를 지지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인철은 현지 답사를 통하여 그 위치를 헤이룽장성 동녕현에 있는 ‘고려령’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고려 전기 거란, 여진 등과 접경한 고려의 북쪽 국경선 문제와 영토 획정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다. 윤관 9성의 위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앞으로도 논의가 지속될 전망이다. 다만, 비석의 실물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논의라는 점에서 한계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