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가 국가적으로 주목되어 정비가 처음 이루어진 시기는 1978년이었는데 1997년에 이르러서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본격적인 학술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2010년 이후의 일이다. 제주고고학연구소는 2012년부터 지금까지 내성과 외성에 대한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2021년에는 항파두리성 동문 문지(門址)의 유구를 확인한 바 있다.
1231년(고종 18) 몽골군의 고려 침입 이후 삼별초(三別抄)는 몽골에 끝까지 저항한 최후의 고려 항몽 세력이다. 1270년(원종 11) 무인 정권이 붕괴되고 고려 정부가 몽골에 굴복하여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서남해안 진도로 거점을 옮겨서 반몽 항전을 지속하였다. 1271년 4월 진도가 함락되자 김통정(金通精, ?~1273)이 지휘하는 삼별초는 다시 제주도로 거점을 이동하였다.
항파두리성의 조성은 삼별초가 제주도에 들어온 1271년 5월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항파두리성을 거점으로 삼별초는 육지의 연안 일대를 공격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1273년(원종 14) 4월 여몽연합군의 조직적 공격에 의하여 진압되고 김통정이 죽음으로써 40여 년 고려에서의 항몽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항파두리성의 둘레는 6km, 면적 1,097,490㎡, 표고는 120~220m이다. 북쪽 방면이 고도가 낮고 경사가 급한 데 비하여 고도가 높은 남쪽은 거의 평탄 지형에 가깝다. 전체가 토축이며 진흙에 자갈을 혼합하여 축성하였다. 남동에서 북서로 연결되는 장축의 길이가 1,450m, 남동에서 북서로 이어지는 최단축의 길이는 660m이다.
공간 구조는 외성과 내성, 그리고 보조성으로 구분된다. 성의 동, 서 방면에는 깊은 골짜기를 수반한 2개의 물 없는 하천이 형성되어 일종의 자연 도랑못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의 고성천(古城川), 서쪽의 소왕천(昭王川)이 그것이다.
삼별초의 지휘부가 주둔한 것으로 추측되는 내성은 1978년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의 건립과 함께 석성(石城)으로 재현된 바 있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원래의 내성은 석성이 아니고 외성과 마찬가지로 토축이었으며 그 규모는 재현된 석성보다 훨씬 큰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된 내성은 강화 중성(江華中城)과 유사한 방식의 축성이라는 점이 주목되었다. 대몽 항전기 강화도와 제주도의 연계성을 직접 확인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별초의 활동은 국가사로서만이 아니라 제주도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키는 전환점이기도 하였다. 이후 육지에의 부속성이 현저하게 촉진되는 분수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는 1231년부터 40여 년을 지속한 항몽 전쟁 최후의 현장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