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반씨족에 대해서는 『 고려사』 권8 세가(世家) 권제8 문종 18년(1064) 5월조에 병부에서 “군반씨족의 장적이 이미 오래 되고 썪어서 이로 말미암아 군액이 불명하다.”고 한 데서 확인된다. 경군 군역을 담당하는 특정의 군호가 있었고 이를 파악하는 군적(軍籍)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고려사』 병지(兵志) 문종 23년 10월에 따르면 "군인이 나이가 들고 병이 있는 경우 그 자손과 친족이 그 군역을 대행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군반씨족의 군적에는 군인 본인과 그 세계(世系), 동거하는 자식, 형제, 조카 및 사위의 친족이 기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군적은 수령이 파견된 지방 관아에서 작성되어 중앙에 올려졌고, 병부에서 이를 종합하여 군적을 작성 비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군반씨족이라는 전문 군인이 경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다는 점이 고려 전기 병제의 특징이었다.
군반씨족의 기원에 대해서 이기백은 태봉에서 실시된 군호제가 고려 건국 이후 계승된 것이라고 보았다. 고려 초 군대는 개성을 근거로 한 왕건의 군대, 궁예의 군대, 국경에 배치되어 있던 신라의 옛 군대, 뒤에 왕건에 귀부(歸附)한 군대 등 다양한 루트가 있는데 이들이 말하자면 경군으로 제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전시과의 실시에 따라 그 경제적 토대로서 군인전이 지급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 경군은 병농일치에 의한 농민에 의하여 구성되는 군사가 아니었다고 본 것이다.
고려 경군의 신분에 대한 이기백의 군반제론에 대해서는 강진철에 의하여 적극적인 반론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 부병제(府兵制)’론이다.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 경군 소속 군인은 가족과 함께 군호에 편입된 지방 농민으로서 3년마다 교대 근무를 하였고, 비번기에는 고향에서 농경에 종사하였다.
전시과에서 언급된 군인전은 이들이 원래 소유하고 있던 민전이었는데, ‘면세’를 조건으로 한 형식적 절차를 거쳐 군인전으로 지급되는 것처럼 모양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균전제에 의한 토지의 지급을 전제로 한 당의 부병제에 대하여 고려시대에는 농민에 대한 토지 지급이 없었기 때문에 부병의 확보를 위하여 별도의 군인전 지급과 같은 형식이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군반제설과 부병제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은 1960년대 이후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이후로 논의는 홍원기, 정경현, 이인철, 오영선, 전경숙 등에 의하여 두 개의 의견이 수정 및 절충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특히 군반씨족의 존재가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4만 5000명으로 추산하는 경군에 대하여 군인전을 전면 지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군반씨족만을 상정한 군인전의 보편적 지급은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군 6위 중에서 친위군 등 일부만이 전시과를 지급 받는 군반씨족이었다는 것으로 설명이 조정되었다. 군반제의 전반적 적용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이다. 따라서 경군의 일부가 군반씨족이 포함된 것은 인정하지만 경군이 군반씨족만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군반씨족의 기원에 대해서도 고려 초 태조 왕건의 군사적 결집력이 아직 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본래 군사 이외에 궁예의 군, 혹은 옛 신라의 군이 함께 그 통제 속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하였다. 왕건이 직접 통솔하였던 군사력이 경군의 기반이 되었고, 따라서 ‘군반씨족’으로 상정할 수 있는 전문 군인 집단도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경군의 구성이 실제로는 군반씨족으로 칭해진 전문 군인 집단만이 아니었다는 것은, 경군의 경우 실제 농민들로부터의 선군(選軍)에 의하여 병력의 다수가 충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제한적 군반제론이 수용됨에 따라, 경군 가운데 어떤 집단이 군반씨족이고 번상한 농민인지에 대한 문제가 야기된다. 국왕 시위군인 2군과 주력부대인 6위 간의 구별이 있었고, 6위에서는 보승(保勝), 정용(精勇) 등 병종의 구분이 존재했었다. 이러한 다양한 구성과 기능이 같은 경군 가운데서도 군역의 성격 차가 개재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2군 6위를 구성하는 다양한 병원(兵員) 중 어느 집단이 군반씨족에 해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요컨대 성종, 현종 연간에 제도화된 고려 전기 경군의 군역은 ‘군반씨족’이라 불리는 특정의 군호의 세습과 함께 농민들로부터의 선군이라는 이원적 구성을 보이고 있는데 대략 12세기 이후 군반씨족의 요소는 해체되어 모든 농민이 군역을 부담하는 병농일치, 부병제적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고려 군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군반씨족’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키가 된다. 4만 5000명에 이르는 경군 전체가 전문 군인 집단인 군반씨족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경군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핵심적 요소가 된 것은 고려 군제의 중요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긴 시간의 학문적 논의 과정을 통하여 역사적 실체를 확인해 간 역사적 작업의 하나로서도 그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