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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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전기의 중앙군(中央軍) 조직.
이칭
이칭
팔위
내용 요약

육위는 고려 전기의 중앙군 조직이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동원한 군대를 새롭게 편제하여 조직하였다. 경군의 중심을 이루는 부대로, 좌우위·신호위·흥위위·금오위·천우위·감문위으로 편성하였다. 좌우·신호·흥위의 삼위는 국왕의 행차에 대한 호가(扈駕), 외국 사신의 송영(送迎) 등을 비롯해 국가의 중요 행사에 참여하였다. 금오위는 수도의 치안을 담당한 경찰부대였고, 천우위는 국왕을 시종하는 의장대였다. 감문위는 궁성 안팎의 여러 문을 지키는 수문군이었다. 당의 부병제를 참조하여 독자적인 군반씨족제를 정비하였다고 평가된다.

정의
고려 전기의 중앙군(中央軍) 조직.
개설

좌우위(左右衛) · 신호위(神虎衛) · 흥위위(興威衛) · 금오위(金吾衛) · 천우위(千牛衛) · 감문위(監門衛)를 일컫는 것으로, 이군(二軍)과 함께 팔위(八衛)로 불리는 등 고려 경군(京軍)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군과 마찬가지로 태조 왕건(王建)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전쟁에 동원했던 군대가 그 중심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태조가 거느리고 있던 군대는 송악(松嶽)의 성주(城主)였던 태조 자신이 보유한 독립된 병력, 패강진(浿江鎭) · 혈구진(穴口鎭)의 병력, 태봉(泰封)의 군대, 지방의 성주들이 거느린 병력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본래 송악지방에 있던 태조의 기간(基幹) 군대와 그의 지휘 밑에 있던 여러 요소의 군대는 중앙군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므로 고려 전기의 중앙군인 경군 편성의 면모는 일찍이 태조가 견훤(甄萱)의 항복을 계기로 후백제(後百濟)신검(神劍)을 쳐서 통일을 완성할 때의 군사 대진 편제와 후대의 경군과 대비함으로써 엿볼 수 있다.

태조가 주1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신검과 최후의 결전을 할 때에는 중군(中軍) · 좌강(左綱) · 우강(右綱)의 삼군(三軍)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 편제는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으로, 보군은 지천군(支天軍) · 보천군(補天軍) · 우천군(祐天軍) · 천무군(天武軍) · 간천군(杆天軍) 등 오군(五軍)으로 구성되었다.

오군은 일시적인 편제라기보다 태조 당시 중앙군의 편성일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중군을 형성하고 있던 우천군 · 천무군 · 간천군은 태조의 친위군(親衛軍)이었을 것이고, 또 각 군은 1천명으로서 모두 3천명이었다.

한편 후일 왕의 친위군인 응양(鷹揚) · 용호(龍虎)의 이군 역시 도합 3영 3천명으로서 서로 병원(兵員)이 같다. 이러한 점에서 전자의 삼군이 뒤에 이군을 형성하게 하는 어떤 연관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지천군 · 보천군의 이군은 마군과 함께 후일 육위(六衛)의 모체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한편 『고려사』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측면에서 태조 2년에 설치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좌강 · 우강은 비록 임시적인 부대배치라고 보겠으나 좌위(左衛) · 우위(右衛)와의 연관을 생각할 수 있으며, 또 병원수는 각기 약 4만씩으로 서로 비슷한 점도 주목된다.

태조가 거느리던 군대가 이군육위(二軍六衛)로 새롭게 편제될 때, 육위와 이군은 각기 시기를 달리해 형성되었다. 우선 육위는 995년(성종 14)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해에는 중앙 · 지방의 관제가 대폭 정리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군사조직의 정비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 군사조직 정비의 목적은, 첫째, 지방 호족(豪族)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을 해체해 그들의 독자적인 병권(兵權)을 박탈하는 데 있었으며, 둘째, 태조 이래의 중앙군을 개편하는 데 있었다. 태조의 부장(副將)들이 거느리던 군대는 그들의 사병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을 국왕의 지휘를 받는 중앙군으로 개편해야만 하였다.

984년 군인의 복색을 정하고, 988년(성종 7)에는 태조 때 군적(軍籍)에 있던 자와 그 자손만을 군적에 남겨 군제의 인적 자원을 정비하였다. 이어 990년 좌우군영(左右軍營)을 설치해 중앙군을 좌위와 우위의 두 편제로 나누었다. 이를 기반으로 육위가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998년(목종 1) 전시과(田柴科)의 지급대상자 규정 속에 육위나 제위(諸衛)의 존재가 발견되고 있다. 육위와 더불어 이군을 설치함으로써 고려의 경군은 그 편제를 완비하게 되었다. 이군이 형성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태조 때의 친위군이 광종(光宗)대에 더욱 강화되었다가 성종(成宗) 때 일단 축소되고, 현종(顯宗) 때쯤 이군으로 정비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현종 때에는 거란(契丹)의 침입, 김훈(金訓) · 최질(崔質)의 반란 등을 겪으면서 특히 궁성의 시위군(侍衛軍)을 강화하고 그것을 확고히 조직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내용

이군육위의 임무와 조직을 보면, 실제에 있어서 임무분장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군인 응양군 · 용호군의 상장군은 ‘근장상장군(近仗上將軍)’, 대장군은 ‘근장대장군(近仗大將軍)’, 장군은 ‘친종장군(親從將軍)’, 중랑장 이하 무관은 ‘근장(近仗)’이라 불렸다. 근장 · 친종이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이군은 임금을 수행하고 경호하는 임무를 담당한 친위군으로서 그 군액은 3영, 3천 명이었다.

이들은 궁성을 지키면서 국왕을 시위하는 임무를 지닌 관계로 국왕과 가까이 할 기회를 자주 가져 출세에 매우 유리하였다. 더욱이 이군 소속의 무반들은 다른 소속의 무반보다 정권에 참여할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무신란(武臣亂) 때의 정중부(鄭仲夫)가 견룡군 출신이었으며, 그와 함께 거사한 이의방(李義方) · 이고(李高) 역시 견룡군의 장교였던 것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군은 육위보다 우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응양군의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반주(班主)라 하여 이군육위의 상장군 · 대장군(大將軍)으로 구성된 중방회의(重房會議)의 의장(儀仗)이 되었으며, 무반의 대표자 노릇을 하였다. 한편, 육위는 경군의 중심을 이루는 부대였다. 병원수에서도 경군 45영, 4만 5천 명 가운데 육위가 42영, 4만 2천 명으로써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육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좌우 · 신호 · 흥위의 삼위(三衛)였다. 이 삼위는 32영, 3만2천명으로 전체 경군의 70%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을 다른 위와 구별해 삼위(三衛)라고도 하였다. 이들 삼위는 국왕의 행차에 대한 호가(扈駕), 외국 사신의 송영(送迎) 등을 비롯해 국가의 중요행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출정(出征)과 방수(防戍)의 임무를 띠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군을 지휘할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전투가 없을 때에는 군사훈련이나 방수,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다. 삼위를 구성하는 정용(精勇) · 보승(保勝)은 마군 · 보군의 병종(兵種)을 구분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으나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지방에서 주2하는 부대이며, 보승은 향촌사회의 부유한 계층 출신, 정용은 일반 농민들 중 신체적 조건이 좋은 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들은 전투의 핵심이 되었으므로 삼위가 이군육위의 중심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삼위 외에 금오위는 수도의 치안을 담당한 경찰부대였다. 뒤에 명칭이 비순위(備巡衛)로 바뀌기도 하였다. 천우위는 국왕을 시종하는 의장대(儀仗隊)였다. 상령(常領) · 해령(海領)의 구별이 있어 육상 · 수상에서 각기 의장대의 임무를 띤 것이라고 보인다.

감문위는 궁성 안팎의 여러 문을 지키는 수문군(守門軍)이었다. 여기에는 현역에 복무하지 않는 휴가병이나 노병 또는 환자병을 소속시키기도 하였다. 이군육위는 그 조직 밑에 영(領) 이하의 하위단위부대를 편성해, 하급 장교를 그 지휘관으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단위부대장들의 회의제도가 따로 구성되어 있었다. 1영은 1천 명이 정원이었으나 실제로는 결원이 많아 6백 명 정도였다.

고려는 중앙군의 편제에 있어 당나라의 부병제(府兵制)를 받아들이고 있었는가의 문제이다. 먼저 육위의 명칭은 당의 중앙군과 비슷한 점이 많아 육위에 편제된 군인을 흔히 부병(府兵)이라고 불렀다.

당의 경우 부병은 지방의 절충부(折衝府) 소속 재향군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울에 와서 근무하는 군인은 위사(衛士)라 하여 고려와 용어상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다만, 고려에서는 절충부라는 군사조직이 성종 때 존재하였다.

여기에는 절충도위(折衝都尉) · 과의(果毅) · 별장(別將) 등의 군관(軍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당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의 절충부는 당나라와 같이 지방에 설치되지 않고 중앙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성종은 당나라의 부병제를 채택해 지방의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대를 중앙정부의 지배 밑에 편제하려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성종의 이러한 계획은 계획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이 고려의 중앙군제는 당나라의 부병제를 일시 참조했으나, 그들의 독자적인 군반씨족제(軍班氏族制)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중앙군제는 기본적으로 당나라의 부병제를 수용했다고 파악하고, 당의 부병제의 실태와 변형된 점이 있다 하여도 이를 부병제로서 파악하려는 연구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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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병제사 연구』(이기백, 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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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기 군제연구』(홍원기, 혜안, 2001)
『한국 군사사 연구』1(국방군사연구소, 1998)
『한국사』5(국사편찬위원회, 1975)
「고려전기 육위제도 연구」(유정수, 『논문집』18권 2호, 경원전문대학, 1996)
「고려전기의 보승군과 정용군」(정경현, 『한국사연구』제81집, 1993)
「고려 이군·육위제의 성격」(홍원기, 『한국사연구』제68집, 1990)
「고려전기 경군의 군영」(정경현, 『한국사론』 제23집, 1990)
「고려초기의 군인전」(강진철, 『논문집』제3집, 숙명대학교, 1963)
「고려 경군고」(이기백, 『고려병제사연구』, 1968)
「高麗兵制管見」(內藤雋輔, 『靑丘學叢』15·16, 1984)
주석
주1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주2

지방의 군사를 뽑아서 차례로 서울의 군영으로 보내 군역(軍役)에 종사하게 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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