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과 최질은 1010년(현종 1)에 거란이 침입하자 이들을 격퇴한 공으로 상장군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최질은 변공이 있는데도 문관직을 얻지 못하여 불만을 품어 온데다가 중추원사 장연우 등의 건의에 따라 경군영업전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하려 하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1014년 박성(朴成) · 이협(李協) · 최가정(崔可貞) · 임맹(林孟) 등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문신들로서 그러한 주장을 해오던 황보 유의(皇甫兪義)와 장연우(張延祐) 등을 포박하고 왕을 협박하여 이들을 귀양보내었다.
그리고 무신으로서 상참(常參)은 모두 문신을 겸하게 하였으며, 또 어사대(御史臺)와 삼사(三司)를 금오대(金吾臺)와 도정서(都正署)로 각각 개편하였다. 이로부터 무관이 문관을 겸하여 정사를 함부로 하게 되자 국가의 기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에 전 화주방어사 이자림(李子琳, 王可道)이 왕에게 올린 계교에 따라 현종은 먼저 이자림을 서경유수판관으로 임명하고 미리 서경에 보내어 친히 장락궁(長樂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때에 이자림 등은 술에 취한 김훈 · 최질 · 이협 · 최가정 · 임맹 등 19인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황보 유의 · 장연우를 다시 불러 기용하고 무신들이 고친 관직의 이름도 모두 복구하였다.
이 김훈 · 최질의 난은 당시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시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뒤에 1170년(의종 24)에 일어난 무신란의 선구가 된 사건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