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통일 ( )

목차
관련 정보
고대사
사건
10세기 초에 후삼국 가운데 하나인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흡수하여 통일한 사건.
사건/전쟁
종결 시기
936년
관련 국가
고려|신라|후백제
관련 인물
왕건|궁예|견훤|경순왕|신검
내용 요약

후삼국통일(後三國統一)은 10세기 초에 후삼국 가운데 하나인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흡수하여 통일한 사건이다. 고려는 건국과 함께 친궁예 세력의 반발을 겪으면서 후삼국의 주도권을 후백제에 빼앗겼는데, 태조 왕건은 호족 연합 정책과 친신라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이를 만회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고창전투 등에서 후백제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검에 의해 쫓겨난 후백제의 견훤과 신라의 경순왕이 차례로 고려에 항복하였고, 936년에는 고려가 마침내 후백제를 공격하여 신검의 항복까지 받았다.

정의
10세기 초에 후삼국 가운데 하나인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흡수하여 통일한 사건.
배경

신라는 철저한 진골 중심의 골품제(骨品制) 사회로서, 지방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왕경(王京) 중심의 사회였다. 그러나 하대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진골 세력의 분열로 골품제의 모순이 심화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잃게 되었다.

특히 889년(진성여왕 3)에 사벌주(沙伐州)에서 발생한 원종(元宗) · 애노(哀奴)의 난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잇달아 저항이 일어났는데, 이를 통해 그동안 신라 사회에서 차별을 받아온 지방민들의 오래된 불만이 폭발하였다. 이때 저항을 주도하였던 지방의 호족(豪族)들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지배 기구까지 갖추고 지방 사회를 통치할 정도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골품제를 부정하고 신라 사회를 해체하는 데 앞장섰던 호족들은 세력 기반의 크기에 따라 더 큰 세력의 호족에 귀부하여 의존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궁예(弓裔)견훤(甄萱)은 이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왕(王)을 자칭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때 궁예는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하고 견훤은 ‘ 후백제’라 하였는데, 그것은 신라가 일찍부터 고구려계 유민(遺民)과 백제계 유민을 차별함으로써 생겨난 삼국의 분립 의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과거의 고구려 영역에서 세력을 키우던 궁예는 그 지역민들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자극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고, 견훤도 백제 영역에 있던 지역민들의 백제 계승 의식을 자극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고 한 것이었다.

후삼국은 이처럼 지방에 대한 차별과 삼국에 대한 분립 의식이 만연한 신라 사회에서 궁예와 견훤이 각각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따라서 궁예나 견훤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키우기 위해서는 호족 세력과의 관계나 고구려 혹은 백제에 대한 계승 의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904년에 이미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고치면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축소하였다. 또한 911년에 후삼국의 영역을 태반이나 차지하자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으로 바꾸면서 신정적(神政的) 전제정치(專制政治)를 추구하였다. 그가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하면서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내세워 정치적인 반대 세력들을 제거한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부인 강씨(康氏)와 두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았고, 자신의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던 청주 세력마저 분열할 정도로 많은 호족 세력들과 갈등을 겪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918년 6월에 왕건(王建)의 정변으로 몰락하였다.

견훤은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에서 자립하였고,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을 자칭하고 나라 이름도 후백제라 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경명왕 2) 이후였다. 견훤은 이때 친궁예 세력이 왕건의 정변에 반발하는 고려 내부의 정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태봉 말기부터 웅주(熊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일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이 철원으로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웅주뿐만 아니라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 등 주현(州縣) 10여 곳의 항복을 받았다.

그해 8월에는 일길찬(一吉飡) 민합(閔郃)을 고려에 보내어 화친을 맺고, 9월에는 매곡(昧谷) 출신의 경종(景琮)이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것을 이용하여 그 누이의 남편인 매곡성주 공직(龔直)을 후백제로 귀부시켰다.

920년(경명왕 4)에는 견훤이 직접 신라의 대야성과 구사성(仇史城: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일대)을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일대)까지 쳐들어갔다. 이에 맞서 고려와 신라는 동맹(同盟)을 맺어서 대응해야 하였다. 고려 태조가 신라 경명왕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진례성으로 군대를 보낸 것이다.

이에 견훤은 군대를 곧바로 철수시키고 한동안 관망하다가 924년(경명왕 8)과 925년(경애왕 2)에 다시 고려의 조물성(曺物城)을 공격하였다. 견훤은 이때 고려 태조와 인질을 교환하면서 화친을 맺기도 하였지만, 양국의 화친은 고려에 볼모로 갔던 견훤의 조카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으면서 파기되었다.

고려 태조는 이때에도 신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면서 927년(경애왕 4) 정월에 후백제의 용주(龍州)를 공격하여 빼앗았고, 계속해서 운주(運州) · 근품성(近品城) · 강주(康州) · 대량성(大良城) 등을 공격하였다.

견훤은 이에 맞서서 같은 해 9월에 근품성과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고 이어서 신라 왕경까지 쳐들어갔다. 그는 이때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함으로써 신라에 친후백제 정권을 수립하였다.

또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온 고려 태조를 공산동수(公山桐藪: 지금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일대)에서 대파한 뒤, 대목군(大木郡) · 소목군(小木郡) · 벽진군(碧珍郡) 등을 침탈하였다.

928년(경순왕 2)에는 강주(康州)와 청주(靑州)를 공략하고 나서 오어곡성(烏於谷城)과 조물성까지 탈취하였다. 929년(경순왕 3)에는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여 성주 장군 홍술(洪述)도 전사시켰다. 후백제의 견훤은 이처럼 고려와 신라의 동맹에 맞서서 후삼국의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930년(경순왕 4) 정월의 고창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여기에다 934년(경순왕 8) 정월에 운주(運州)에서 고려에 다시 대패하였다. 그 뒤 후백제는 견훤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내분까지 발생하였다. 그 결과 신검(神劒)이 935년(경순왕 9) 3월에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 후백제는 그 이후 더 이상 후삼국통일을 도모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된 뒤 사실상 왕실을 보존하는 데 급급하였다. 궁예가 905년(효공왕 9) 8월에 죽령(竹嶺) 동북쪽을 침략하였을 때, 신라 효공왕은 이미 이를 힘으로 막을 수 없어서 성주들에게 나가서 싸우지 말고 굳게 지키라고만 하였다. 920년(경명왕 4)에는 견훤이 대야성과 구사성을 함락시키고 진례성까지 쳐들어오자, 경명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경애왕은 927년(경애왕 4)에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의 용주를 공략하였지만,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경주에 쳐들어온 견훤에 의해 시해당하였다. 경순왕도 신라에 친후백제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던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고창전투 이후에 다시 고려 태조와 협상해야만 하였다. 신라가 이러한 처지에서 후삼국의 통일을 도모할 수는 없었다.

내용

왕건은 송악 지방에서 조상 대대로 해상무역에 종사하면서 부를 축적해 온 호족 출신이었다. 그는 896년(진성여왕 10)에 아버지 용건(龍建)과 함께 궁예에게 귀부하면서 송악에 발어참성(勃禦槧城)을 쌓고 성주가 되었으며, 898년(효공왕 2)에 궁예가 도읍을 그곳으로 옮겼을 때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었다.

또한 900년(효공왕 4)에는 광주(廣州) · 충주(忠州) · 청주(靑州) · 당성(唐城) · 괴양(槐壤) 등지에서 양길 세력을 격파하였고, 903년(효공왕 7)에는 금성군(錦城郡)을 공략하고 나서 양주(良州)를 구원하고 돌아오는 등 궁예를 도와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궁예가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하였다가 다시 태봉으로 나라 이름을 고치면서 신정적 전제왕권을 추구하자, 왕건은 궁예와 거리를 두고 주로 나주 지역을 경략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 918년 6월에 홍유(洪儒) · 배현경(裵玄慶) · 신숭겸(申崇謙) ·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때 나라 이름을 다시 고려로 바꾸고 도읍도 송악으로 옮겼다.

왕건이 나라 이름을 고려로 바꾼 것은 궁예에 의해 밀려났던 고구려 계승 의식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한 것이었다. 그가 궁예를 제거했던 것은 신정적 전제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호족 세력의 역할을 더 보장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왕건의 집권과 고려 건국이 누구에게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즉위한 지 불과 5일만에 환선길(桓宣吉)의 모반을 겪었다. 또한 마군대장군 이흔암의 모반도 있었고, 이를 계기로 웅주 · 운주 등 10여 주현의 지방 세력들이 후백제에 귀부하기도 하였다.

특히 임춘길진선(陳瑄) · 선장(宣長) 등 청주 세력의 모반이 계속되면서, 태조 왕건은 청주 지역 전체가 후백제로 귀부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실제로 임춘길의 모반을 계기로 매곡성주 공직이 후백제에 귀부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태조 왕건은 명주장군(溟州將軍) 순식(順式)이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아서 근심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태조 왕건과 함께 정변을 일으켰던 환선길의 모반은 궁예를 제거하는 데 동참하였던 반궁예 세력들이 분열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이를 제외한 사건들은 대부분 왕건이 일으킨 정변에 불만을 품었던 친궁예 세력들의 반발이었다.

이처럼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집권하자마자 이에 반발하는 많은 호족 세력들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요좌(遼左)를 3분(分)하여 그 태반을 점유하였던’ 궁예의 태봉을 차지하고도 견훤의 후백제에 후삼국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따라서 그는 호족 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고 이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이에 태조 왕건은 호족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각지의 호족들에게 단사(單使)를 보내어 중폐비사(重幣卑辭)의 저자세로 화친을 권하였고 귀부해 온 자들을 특별하게 대우하였다. 또한 각지의 유력한 호족 세력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29명의 후비(后妃)를 두기도 하였고, 왕씨(王氏) 성을 내림으로써 의제적 가족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은 이들과 넓은 의미의 친족관계를 맺음으로써 고려의 왕실 세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태조 왕건은 또한 신라에 대한 정책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그가 집권하자마자 직면한 친궁예 세력의 반발은 궁예를 몰아낸 자신의 정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일으킨 정변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태조 왕건은 궁예가 일찍부터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면서 병탄할 마음을 가졌던 점에 주목하면서 궁예 정권의 부당함을 거론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신라 왕실을 부정하였던 궁예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친신라 정책을 내세웠다. 그는 이를 통하여 내부적으로 친궁예 세력의 저항을 무마하고 외부적으로 신라 경명왕과 관계 개선에 나섰다. 그 결과, 태조 왕건은 920년(태조 3)에 신라 경명왕의 구원 요청을 받을 수 있었고, 이를 받아들이면서 고려의 군대를 진례성으로 보내어 견훤의 후백제군을 물리쳤다.

그렇지만 태조 왕건의 신라 정책이 일방적으로 신라 왕실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명분상 ‘존왕(尊王)의 의(義)’를 내세면서 실제로는 고려의 실리를 얻으려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927년(태조 10)에는 후백제의 용주를 공략하면서 경애왕의 군사적 지원까지 받아 냈고, 930년(태조 13)에는 경주 가까이에 있는 일어진(昵於鎭)까지 행차하여 경순왕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벌이다가 송악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또한 931년(태조 14)에는 경순왕으로부터 ‘귀순할 뜻을 알려왔다.’라고 표현될 정도의 양보를 받은 뒤에 경주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존왕의 의’를 강조한 태조 왕건이 먼저 신라 왕실을 장악한 뒤에 그 왕명을 내세워 호족 세력과 견훤의 후백제까지 제압하고자 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고려 중심의 후삼국통일을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고려 건국과 함께 후삼국의 주도권을 후백제에 빼앗겼던 태조 왕건은 이처럼 호족 세력을 우대하는 호족 연합 정책과 명분상으로나마 신라 왕실을 우대했던 친신라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이를 근간으로 후백제와 화친을 맺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점차 후삼국의 주도권을 되찾고 마침내 통일까지 이룩할 수 있었다. 그는 고려를 건국한 지 두 달 뒤인 8월에 견훤이 보내온 일길찬 민합을 환대하면서 후백제와 처음으로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920년에 경명왕의 요청으로 진례성에 군대를 보내어 견훤과 대치하면서 화친 관계를 깨뜨렸다. 견훤은 이 때문에 군대를 철수하였다가 조물성을 공격할 때까지 고려와 겉으로만 화친을 맺고 속으로는 대립하였다. 이것은 태조 왕건이 경명왕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후백제를 견제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견훤이 924년(태조 7) 7월과 925년(태조 8) 10월에 고려의 조물성을 공격해 온 것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것이었다. 태조 왕건은 이에 맞서 싸우다가 인질을 교환하면서 견훤과 다시 화친을 맺었다.

신라의 경애왕은 이때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하고 거짓이 많으니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태조 왕건이 견훤과 화친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 왕건이 견훤과 화친했던 것은 경애왕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견훤과의 화친을 곧바로 파기한 뒤에 경애왕과 다시 맺은 관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태조 왕건과 견훤의 화친은 고려에 볼모로 왔던 견훤의 조카 진호가 926년(태조 9) 4월에 갑자기 죽으면서 곧바로 파기되었다. 그런데 태조 왕건은 그 직후인 927년(경애왕 4) 정월에 경애왕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면서 후백제의 용주(龍州)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리고 운주 · 근품성 · 강주 · 대량성까지 공격하였다.

태조 왕건은 이처럼 경애왕과 동맹의 내용을 바꾸면서 신라의 군사 지원을 받아서 후백제를 공격할 수 있었다. 태조 왕건과 경애왕의 이러한 동맹은 후백제의 견훤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견훤이 같은 해 9월에 근품성과 고울부를 공격한 뒤에 전격적으로 신라 왕경을 쳐들어간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견훤은 이 때문에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하면서 신라에 친후백제 정권을 세웠다.

태조 왕건은 이에 대항하여 신라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공산동수에서 김락(金樂)신숭겸(申崇謙) 등이 전사하고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정도로 견훤에게 참패하였고, 대목군 · 소목군 · 벽진군까지 침탈당하였다. 그리고 928년에는 강주 · 청주 · 오어곡성 · 조물성 등이, 그 이듬해에는 의성부가 후백제에 약탈당하였다.

태조 왕건은 이 과정에서 다시 견훤에게 후삼국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듯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930년(태조 13) 정월의 고창전투에서 견훤에게 대승을 거두면서 다시 전세가 바뀌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영안(永安: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 하곡(河曲: 지금의 경상북도 울산시 일대), 직명(直明), 송생(松生: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일대) 등 30여 군현의 귀부도 받았다.

또한 2월에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일대)로부터 흥례부(興禮府: 지금의 경상북도 울산시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서 모두 110여 개의 성(城)이 잇달아 귀부해 왔다.

그런데 태조 왕건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유금필(庾黔弼)의 활약도 컸지만, 고창의 성주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 · 장길(張吉) 등과 같은 지역민의 도움이 컸다. 특히 김선평은 견훤이 신라 왕경에 쳐들어가서 경애왕을 시해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태조 왕건에게 협력하였다. 고창 성주였던 그는 신라 왕실에 대해 우호적인 성향의 호족이었다. 그가 명분상으로나마 신라 왕실에 우호적이었던 태조 왕건에게 귀부했던 것이다.

아무튼 태조 왕건은 이처럼 고창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후삼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사실상 통일의 전기까지 마련하였다. 그는 이를 계기로 경순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경주에 들어가서 신라 조정을 다시 친고려 정권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932년(태조 15) 2월에 대상(大相) 왕유(王儒)를 후당(後唐)에 보내어 책봉을 요청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 마침내 명종의 책봉을 받았다. 또한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후백제에 귀부하였던 매곡성주 공직도 이때 다시 고려로 와서 항복하였다.

934년(태조 17) 정월에도 태조 왕건은 운주(運州)에서 견훤의 후백제군 3천 명을 전사시키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소문을 들은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항복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다 935년(태조 18) 3월에는 후백제에서 견훤의 큰아들 신검(神劒)이 정변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르는 내분이 발생하였다.

견훤은 이때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있다가 막내아들 능예(能乂) 등과 함께 같은 해 6월에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크게 기뻐하면서 견훤을 ‘상보(尙父)’라 일컫고 남궁(南宮)에 머물게 하고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면서 크게 환대하였다.

후백제에서 이처럼 견훤이 고창전투에 이어 운주전투에서 잇달아 참패하고 결국 고려에 귀부하게 되자, 신라에서도 경순왕이 마침내 고려에 항복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935년 11월에 섭시중(攝侍中) 왕철(王鐵) 등을 보내어 경순왕을 맞이해 왔다.

그리고 태조 왕건은 경순왕을 자신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와 혼인시킨 뒤에 정승(政丞)으로 임명해서 그 지위를 태자보다 높게 하고 해마다 녹봉(祿俸) 1천 석을 주었다. 또한 신란궁(神鸞宮)을 지어서 내려주고,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로 고치면서 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태조 왕건은 이로써 경상도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 오던 신라를 먼저 고려에 흡수하였다.

한편, 936년(태조 19) 2월에는 후백제에서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朴英規)도 고려에 귀부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신검을 응징해 달라는 견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하면서 후백제를 전면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먼저 정윤(正胤) 무(武)와 박술희(朴述希)로 하여금 보기(步騎) 1만 명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로 나아가게 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 자신이 직접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로 나아가서 군대를 다시 조직하였다.

이때 고려군은 좌강(左綱)에 대상(大相) 견권(堅權)과 박술희(朴述希) 등이 이끄는 마군(馬軍) 1만 명과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 원윤(元尹) 능달(能達) 등이 이끄는 보군(步軍) 1만 명이 있었고, 우강(右綱)에 대상 김철(金鐵) · 홍유(洪儒) · 박수경(朴守卿) 등이 이끄는 마군 1만 명과 보천군대장군(補天軍大將軍) 원윤 삼순(三順) 등이 이끄는 보군 1만 명이 있었다.

중군(中軍)에는 대광(大匡) 왕순식(王順式)과 대상 긍준(兢俊) 등이 이끄는 마군 2만 명, 대상 유금필(庾黔弼) 등이 이끄는 흑수(黑水) · 달고(達姑) · 철륵(鐵勒) 등 여러 번(蕃)의 정예 기병 9천5백 명, 우천군대장군(祐天軍大將軍) 원윤 정순(貞順) 등이 이끄는 보군 1천 명, 천무군대장군(天武軍大將軍) 원윤 종희(宗熙) 등이 이끄는 보군 1천 명, 간천군대장군(杆天軍大將軍) 김극종(金克宗) 등이 이끄는 보군 1천 명이 있었다. 여기에 삼군(三軍)의 원병(援兵)으로 대장군 대상 공훤(公萱) 등이 이끄는 기병 3백 명과 여러 성의 군사 1만 4천7백 명 등이 있었다.

태조 왕건은 이들을 이끌고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으로 진격해서 일리천(一利川)에서 신검이 이끌고 온 후백제군과 맞서 싸웠는데, 후백제의 좌장군(左將軍) 효봉(孝奉) · 덕술(德述) · 애술(哀述) · 명길(明吉) 등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장군(將軍) 흔강(昕康) · 견달(見達) · 은술(殷述) · 금식(今式) · 우봉(又奉) 등 3천2백 명을 사로잡고, 5천7백여 명을 참수하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산군(黃山郡)까지 달아나는 후백제군을 추격해서 신검과 청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劒),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劒) 등의 항복을 받았다.

태조 왕건은 이로써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후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태조 왕건은 이때 양검과 용검 등을 유배 보냈다가 죽였지만, 신검에게는 오히려 작(爵)까지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견훤은 신검의 항복으로 후백제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고 한다.

의의 및 평가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한 것은 통일 이후 생겨난 삼국에 대한 분립 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였다. 궁예와 왕건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우고 견훤이 백제 계승 의식을 이용하여 각각 나라를 세웠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단순히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흡수하였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신라의 통일 이후 계속되었던 삼국에 대한 분립 의식이 다시 고려 왕조를 중심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려 왕조는 실제로 ‘통일’을 강조하면서 꾸준히 삼국에 대한 계승 의식을 희석시키면서 우리 민족을 재통합하였다. 그 결과 예맥(濊貊族) 계통과 한(韓) 계통으로 구성된 우리 민족은 조선 왕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왔다고 하겠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에 대한 분립 의식을 극복하지 못하였던 것은 철저한 진골 중심의 골품제 사회로서, 특히 왕경인에 비해 지방민을 차별하였던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후삼국의 분열도 사실 이러한 차별에 불만을 품었던 지방 호족들의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고려의 태조 왕건 역시 신라의 변방이었던 송악 지역의 호족 출신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고려 건국으로부터 후삼국통일에 이르기까지 호족 연합 정책을 추진하면서 각지의 호족 세력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왔다. 따라서 후삼국통일은 지방의 호족 세력들이 고려 왕조에서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고려 사회의 지배 집단이 중앙의 진골 중심으로 구성된 신라 사회의 지배 집단에 비해 크게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그 도읍이었던 송악 지역이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전의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중앙과 지방을 구분하고 있었는데,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송악을 중심으로 중앙과 지방이 재편된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역사의 중심 무대가 바뀌면서 신라 사회에서 나타났던 지방에 대한 차별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후삼국통일로 송악 지역이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로 바뀐 것은 한양(漢陽)에 도읍하였던 조선(朝鮮)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중부 지방이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로 자리 잡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926년(태조 9)에 발해(渤海)거란(契丹)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고려는 태조 이래로 꾸준히 그 유민들의 귀부를 받아들여서 그 수효가 십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려의 전체 인구가 남녀 210만 명에 이르렀다는 『송사』의 기록을 따른다면, 이때 귀부한 발해 유민의 수효는 고려 전체 인구 중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규모였다. 이것은 사실상 대한민국 역사상 대규모로 이루어진 마지막 인구 유입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신라에서 분열한 우리 민족 공동체를 재통합한 것에 그치지 않고, 발해 유민의 귀부를 받아들임으로써 오늘날 우리 민족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틀까지 확대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발해를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시켜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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