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淸州)를 기반으로 했던 호족으로서 왕경(王京)에 초치된 자로 추정된다. 궁예(弓裔)가 이 곳 주민을 철원에 이전시킨 이래, 이미 본관을 떠나 상경종사하는 세력과 아직 토착해 있는 현지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시기·반목하거나 지방세력 내부에서도 대립하여 왕건(王建)과의 관계에서도 충역(忠逆)이 무상하여 고려 개국 당시에 왕건이 가장 심려하던 지방이었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와 동시에 청주 출신의 명길(明吉)·문식(文植)과 함께 능달을 청주에 보내어 그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능달은 돌아와 반역의 조짐이 없다고 고한 데 반하여 문식·명길은 청주인 김근겸(金勤謙)·관준(寬駿)에게 반역의 조짐이 있다고 하였다.
이때 능달은 청주의 민심을 대변하고 감싸주는 구실을 수행하다가 청주와 연결된 중앙관인 및 재지세력(在地勢力)에서 반란이 계속되자 중앙정계에서 도태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