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년(현종 1) 10월 거란에 대비하기 위해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지금의 평안북도 宣川)에 주둔하게 했을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행영도병마부사(行營都兵馬副使)에 임명되어 종군하였다.
그해 11월 거란의 성종이 목종살해사건을 문죄한다는 구실로 40만 명을 이끌고 침입하자 강조의 군대가 통주의 남쪽에 나와 삼수채(三水砦)를 설치하여 싸우다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예빈경(禮賓卿)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