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弓裔) 말년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으로서 웅주(熊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를 공격 탈취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조가 즉위하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서울에 올라옴으로써 웅주가 후백제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
이 때 한찬(韓粲)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 염장(閻萇)이 웅주를 잃은 것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과 더불어 이흔암에게 반란의 뜻이 있음을 밀고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나인(內人)을 시켜 이흔암의 집을 엿보게 하였다. 결국, 이흔암의 처 환씨(桓氏)로부터 반란을 모의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태조 원년(918) 6월의 일로, 이흔암의 처가 환씨인 점으로 미루어 앞서 일어난 환선길(桓宣吉)의 모반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흔암·환선길의 모반사건은 궁예의 핵심적인 지지세력에 의한 것이라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