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천전투(一利川戰鬪)는 고려와 후백제, 신라 간의 전쟁을 종식시킨 후삼국시대 최후의 전투로, 936년(태조 19)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에서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벌인 전투를 말한다. 일리천은 구미시 인동면을 지나는 낙동강 지류이다.
935년(태조 18)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뒤 고려와 후백제만이 대적하고 있었다.
당시 후백제의 상황은 견훤(甄萱)이 고려에 투항하고 아들 신검(神劍)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936년 6월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후백제의 신검을 칠 것을 청하여 태조가 이에 응해, 먼저 태자 왕무(王武: 뒤의 혜종)와 장군 박술희(朴述希)를 보병과 기병 1만 명과 함께 천안부(天安府)로 보냈다. 천안부는 후백제군이 추풍령을 넘어와 김천(金泉)과 선산을 거쳐 군위(軍威)와 칠곡(漆谷) 일대로 진출하는 경로를 방어하는 거점이었다.
9월에는 태조 자신이 3군(三軍)을 이끌고 천안부에 이르러 합세해 일선군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두 나라 군대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고려군은 마군(馬軍) 4만 명, 보병 2만 3,000명, 기병 9,800명에 여러 성의 군사 1만 4,700명 등 총 8만 7,500명으로 후삼국시대 삼국의 쟁패 과정 중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다.
참가한 장군은 명주대광(溟州大匡) 왕순식(王順式), 대상(大相) 유금필(庾黔弼) · 김철(金鐵) · 홍유(洪儒) · 박수경(朴守卿) · 견권(堅權) · 박술희 · 긍준(兢俊) · 공훤(公萱) 등 『고려사(高麗史)』 에 나오는 장수 이름만도 38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이 싸움의 중요성을 알 만하다. 이러한 대규모 병력 동원은 견훤의 요청에 따른 역자징치(逆子懲治)의 의미를 넘어선 것으로서 그 목적이 후백제의 멸망에 있음을 짐작케 해 준다. 왕건은 일리천전투에 앞서 3군과 원병을 근간으로 하는 후백제 정벌군을 편성하였는데, 마군과 보군을 구분하여 총 38명의 장수로 하여금 지휘토록 하였다. 정벌군의 이동은 선발대 1만의 병력을 천안부에 파견하여 전투를 준비토록 하고, 왕건은 본대인 3군 6만여 명을 거느리고 육로로 이동하여 천안부에 집결하였다. 그런 다음에 선발대와 합세하여 군사를 재편성한 다음 일선군으로 이동하였다.
후백제는 고창전투(古昌戰鬪) 이후 후삼국 주도권의 상실과 그 만회의 실패, 운주전투(運州戰鬪)에서의 패전과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 이북 지역 상실, 정변에 따른 후유증, 견훤의 고려 귀부, 신라의 고려에의 투항 · 병합 등으로 대내외적 조건이 악화일로에 처해져 있었다. 특히, 견훤의 참전은 후백제군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갈등도 야기시켰을 것이다.
또, 신검에 의해 금강(金剛)이 제거되면서 전주(全州) 지역의 호족(豪族)들도 후백제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들은 광주(光州) 지역 호족에 기반을 둔 신검보다 전주 지역 호족을 외척으로 둔 금강을 지지하였다. 지방 호족들이 이탈하면서 후삼국 성립 이후 우위를 지켰던 후백제는 군사력 면에서도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후백제의 좌장군(左將軍) 효봉(孝奉) · 덕술(德述) · 애술(哀述) · 명길(明吉) 등이 싸워보지도 않은 채 항복하고 오히려 태조에게 “신검이 중군(中軍)에 있으니 좌우로 협공하면 반드시 그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신검을 공격할 계책까지 진언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에서 당시 고려군의 강력한 병세에 위압된 측면도 있지만, 신검 정권에 대한 후백제의 호족과 장군들의 반발도 알 수 있다.
태조는 대장군 공훤에게 명해 곧바로 후백제의 중군을 치게 하고 3군이 일제히 전진해 공격하니 후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후백제군은 지휘부가 무너지면서 내분이 발생하여 자멸에 이르렀다. 장군 흔강(昕康) · 견달(見達) 등을 비롯해 3,200명이 포로가 되고 5,700명이 전사하였다.
신검은 패잔병을 이끌고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어 영동-금산을 거쳐 논산에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고려군은 황산군(黃山郡: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으로 진입하여 탄령(炭嶺)을 넘어 마성(馬城)에 진군해 주둔하였다. 탄령은 탄현(炭峴)으로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 대전 동쪽의 마도령, 금산군 진산면 숯고개 등으로 보고 있다. 신검은 부여와 대전, 영동 등에 배치된 병력을 규합하여 고려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력의 절대적인 열세와 저하된 사기를 감안하여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아우 양검(良劍) · 용검(龍劍)과 문무 관료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일리천전투는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 운명을 건 일대 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가 참패하고 멸망하면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