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는 인종의 후비(后妃)이자, 의종(毅宗)·명종(明宗)·신종(神宗)의 모후이다. 본관은 정안(定安)이고, 아버지는 중서령 임원후(任元厚), 어머니는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딸이다.
공예태후가 태어날 즈음 이위는 그녀가 궁궐에서 노니는 귀인(貴人)이 될 것이라는 현몽을 꾸었다. 1123년(인종 1)에 그녀는 경주인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와 혼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혼인날 당일 태후가 갑자기 병이 나서 혼인이 무산되었다. 임원후가 점을 치니, 무당은 그녀가 귀히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자겸은 임원후를 개성부사로 강등시켰다. 개성부사로 재직한 지 1여 년 되는 해에 그의 막료의 꿈에 태수(太守) 청사의 대들보가 벌어지며 큰 구멍이 생기더니 황룡(黃龍)이 그 구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또 인종도 들깨 5승(升)과 황규(黃葵) 3승을 얻는 꿈을 꾸어 임씨 왕비를 맞을 것이라는 해몽을 들었다.
1126년(인종 4) 꿈이 현실이 되었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그의 딸인 인종의 왕비들이 폐출된 것이다. 태후는 그해 6월 20일에 18세의 나이로 인종과 혼인하였다. 그녀는 연덕궁주(延德宮主)로 불리었고, 1127년 4월 11일에 장남인 의종을 출산하였다. 1129년(인종 7) 5월 10일에 인종은 직접 연덕궁을 방문하여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1130년(인종 8)에는 둘째 아들인 대녕후 왕경(大寧侯 王璟)을, 다음해 10월 17일에는 명종을 낳았다. 이후 원경국사(元敬國師) 충희(沖曦)를, 1144년(인종 22)에 신종을 출산하고, 승경(承慶)·덕녕(德寧)·창락(昌樂)·영화(永和) 등 4명의 궁주(宮主)를 낳았다. 인종은 공예태후의 고향인 장흥부(長興府)를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시켰다.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왕태후로 존칭하고, 궁전을 후덕전(厚德殿)이라고 하였으며, 선경부(善慶府)를 두었다. 공예태후는 처음에 의종의 자질을 의심하고 둘째인 대녕후를 총애하여 그를 태자로 삼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의종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표면화된 것은 1151년(의종 5)에 발생한 대녕후 경을 둘러싼 모반사건이었다. 태후는 대녕후 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의종을 설득하는데, 의종은 오히려 지난날의 섭섭함을 표출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버선발로 궁전에서 내려가서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맹세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쳐 의종은 자기 잘못을 뉘우쳤다고 한다.
1170년 무신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즉위하였다. 명종대에 태후가 유종(乳腫)을 앓고 있었으므로 왕이 아우인 충희(沖曦)를 불러 간병하게 하였다. 1182년(명종 12) 충희가 죽었는데, 태후에게 이를 늦게 알리자 태후는 충희가 무신들에 의해 살해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병을 얻었다. 신종이 평량공(平諒公)으로 있을 때에 그도 치질을 앓아서 오랫동안 태후에게 문안하지 못하니 태후는 평량공도 충희와 같은 화를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명종의 명령을 받은 평량공이 태후를 문안하고 위로하였으나 태후는 병이 진행되어 1183년 향년 75세로 사망하였다.
순릉(純陵)에 안장하고, 시호를 공예태후라고 하였다. 1184년 금나라에서 조문을 보내어 추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