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년(고종 18) 8월 몽골군은 고려에 대한 첫 침입을 개시한다. 이들은 한동안 북계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12월 1일 개경에까지 이른다. 이후 몽골군 일부는 한강을 건너 광주(廣州)를 경유하여 남하하는데, 12월 하순에는 충주(忠州)까지 남하하였다. 충주는 중부 지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몽골군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충주에 침입하였다.
광주를 거쳐 충주에 이르는 과정에서 몽골군은 여러 지역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몽골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충주에서는 양반, 관노, 잡류(雜類) 등의 별초군(別抄軍)을 조직하여 몽골군 침입에 대비하였다.
충주부사 우종주(于宗柱)는 양반별초를 지휘하고, 판관 유홍익(庾洪翼)은 관노와 잡류를 각각 지휘하였는데, 문제는 두 사람 사이에 평소 의견 대립이 잦았다는 점이다. 몽골군에 대한 방어책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충주성(忠州城)을 지키며 항전할 것인지, 아니면 인근의 험한 산성으로 피란하여 저항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도 서로 엇갈렸던 것 같다. 대책이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몽골군이 들이닥치자 우종주와 유홍익을 비롯한 관리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이에 관노와 잡류들만 남아 힘을 합쳐 싸워서 가까스로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평소에 차별적 대우를 받던 관노와 잡류들이 영웅적 전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충주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충주에서의 이후 상황은 관노들의 봉기로 이어졌다. 몽골군이 물러간 후 돌아온 충주부사 우종주는 전투 중 몽골군이 탈취해 간 관사(官私)의 은기 등 물품 분실에 대한 책임을 성에 남아서 싸운 관노들에게 전가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분개한 관노들이 봉기하여 평소 원성이 많은 지역 토호들까지도 살해하게 된다. 정부는 강압적인 진압을 준비하였지만, 판관 유홍익이 온건한 사태 수습을 건의하였다. 이에 정부는 박문수(朴文秀)와 김공정(金公鼎)을 충주안무별감으로 파견하여 사태를 유화적으로 수습하게 된다. 이듬해 1232년(고종 19) 1월의 일이다.
1231년 충주전투는 몽골군의 1차 침입 과정 중 가장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로서, 몽골과의 항전에서 하층민들이 전투의 주체였음이 주목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충주는 이후에도 몽골군의 지속적 침략의 대상이었지만, 번번이 충주 민중들의 용감한 항전으로 위기를 극복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