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왕온 묘 ( )

고려시대사
유적
국가유산
고려 후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고려 왕족 왕온의 묘로 전해지는 무덤.
이칭
이칭
전왕온의묘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
건립 시기
고려 후기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왕온
높이
2m
지름
7m
소재지
전라남도 진도군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전왕온의묘(傳王溫의墓)
분류
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고려시대
지정기관
전라남도
종목
전라남도 시도기념물(1988년 12월 21일 지정)
소재지
전남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산4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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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전왕온묘(傳王溫墓)는 고려 후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고려 왕족 왕온의 묘로 전해지는 무덤이다. 왕온은 1271년 진도 용장성이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면서 피신하던 중 홍다구에 의하여 아들 왕환과 함께 살해되어,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왕무덤재에 묻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의
고려 후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고려 왕족 왕온의 묘로 전해지는 무덤.
조성 경위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은 대몽 항전기에 항몽전을 주도하였던 삼별초에 의하여 추대된 삼별초 진도 정부의 왕이다. 혈통상으로는 고려 현종의 아들인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의 7대손에 해당한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가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환도를 거부하고 반몽 항전의 지속을 주장하며 봉기하였다.

이때 삼별초 정부의 왕으로 옹립되어 6월 1일 강화도를 출발, 배중손과 함께 진도로 거점을 옮겨 용장성(龍藏城)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271년 4월 용장성은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이때 성을 벗어나 급히 피신하던 중 홍다구에 의해 붙잡혀 아들 왕환(王桓)과 함께 살해되었다.

왕온은 몽골군에 합류하여 고려에 들어온 영녕공 왕준(王綧)의 형이다. 동생인 왕준은 진도 함락의 소란 속에 왕온의 목숨을 구하고자 노력하였지만,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가 왕온을 고의로 먼저 참살하였다.

형태와 특징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의 용장성에서 논수골로 가는 사이에 왕무덤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여기에 왕온의 것으로 전하는 무덤이 있다. 무덤의 크기는 지름 7m, 높이 2m이다. 봉분 앞 좌우에는 강화도의 능묘에서 볼 수 있는 고려시대 석인상 2구가 세워져 있어 조성 시기를 암시하고 있다. 1988년 12월 21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의의 및 평가

왕온묘는 삼별초 관련 인물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삼별초의 지도부는 반역자로 간주되어 관련 유적이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왕온의 무덤이 확실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전왕온묘(傳王溫墓)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윤용혁, 『삼별초, 무인정권·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혜안, 2014)
윤용혁,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일지사, 2000)
집필자
윤용혁(공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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