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신종의 6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익양후(益陽侯) 왕빈(王玢)이고, 아버지는 보성군(寶城君) 왕희(王熙)이다. 공양왕이 신종의 7대손이고 익양후 왕빈의 증손자이므로 공양왕에게는 종숙(從叔)이 된다. 아들은 순평군(順平君) 왕산(王珊), 원윤(元尹) 왕형(王珩), 정윤(正尹) 왕근(王瑾) 등이고, 사위는 이숭인(李崇仁)의 동생인 이숭문(李崇文)이다.
1371년(공민왕 20) 처남 신순(辛珣)이 신돈(辛旽)의 당여로 지목받아 사형당하자, 이에 연좌되어 무릉도(武陵島)에 유배되었다. 그 뒤 생사를 알지 못하다가 일본에 표류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부인 신씨(辛氏)가 도당(都堂)에 요청하여 가노(家奴)를 일본에 보내 찾도록 하였다.
1389년(창왕 1) 가노가 영흥군 왕환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왔지만, 그 모습이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조(父祖)의 이름이나 자기가 살던 고장조차 알지 못하였으므로 의심을 받았다.
이 때 부인 신씨의 종제(從弟)인 전 판사(前判事) 신극공(辛克恭), 전 판개성부사(前判開城府事) 박천상(朴天祥), 전 밀직부사(前密直副使) 박가흥(朴可興),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숭인, 하륜(河崙) 등 그의 인친(姻親)들은 영흥군 왕환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부인 신씨는 자기 남편이 틀림없다고 하여 결국 헌부(憲府)에 송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흥군 왕환의 두 아들과 여러 종실들이 그가 영흥군임을 입증함으로써, 박천상·신극공·박가흥·하륜 등은 무고(誣告)의 혐의를 받고 유배되었다. 한편, 우왕 때 밀직부사를 지낸 최운해(崔雲海)의 처 권씨(權氏)가 영흥군에게 재가(再嫁)하였는데, 이 때문에 문하부(門下府)가 헌사(憲司)에 통첩하여 권씨를 국문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