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은 약 13㎞에 이르는데, 평탄지와 경사지에서 각각 다르게 축조되었다. 평탄지에는 내벽과 외벽을 쌓는 협축(夾築) 방식으로 쌓였으며, 경사지에는 바깥쪽만 돌로 쌓는 편축(片築) 방식을 사용하였다. 성벽의 바닥면에는 작은 돌을 두어 지면을 다졌고, 그 위에 두께 10cm 정도의 일정하지 않은 널돌을 바깥쪽으로 12∼15cm 정도 내밀어 쌓은 다음 다시 위쪽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용장성에서 가장 높은 곳은 남쪽에 위치한 해발 215m의 서낭산 정상부인데, 여기에는 이전에 산 정상부를 둘러 쌓은 작은 규모의 퇴뫼식 성벽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성 전체는 물론 주변 지역이 일목요연하게 관측되므로, 망대(望臺)와 같은 군사 시설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축대를 쌓아 층층이 나눈 층단식(層段式) 평지가 있고, 건물터 등도 곳곳에 남아 있다. 원래 용장성에는 고려시대에 절이 있었는데, 삼별초가 허물고서 행궁을 지었으므로 ‘궁궐터’라고 불렸다. 궁궐터는 북향의 경사면에 자리하였기에, 건물은 모두 북향을 하였을 것이다.
1980년대에 지표조사가 이루어진 뒤 2004년부터는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시행되었다. 건물터 발굴조사에 의해서 건물 구조가 확인되었고 많은 양의 기와 조각과 청자 조각, 불구(佛具), 석탑 부재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2009년∼2010년에 진행된 궁궐터 전면 조사를 통해서는 삼별초의 진도 이동이 고려 왕실의 강화 천도에 이은 또 하나의 천도였음이 확인되었다. 곧 20여 채 이상의 건물은 성 안에 치밀하게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마치 개경 만월대를 연상시키는 구조여서, 매우 섬세한 계획에 의해서 궁궐이 조성되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로써 삼별초가 진도가 들어간 뒤에야 용장성이 설계되고 시공된 것이 아니라, 진도로 옮기기 전에 이미 기본적인 설계와 궁궐 조성 작업의 일부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산성의 축성 시기에 대해서는 1243년(고종 30)이나 1260년(원종 1)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1268년(원종 9)부터 궁궐이 시공되었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