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금성산(金城山)에 있는 고려시대 이후 입보용으로 사용된 성곽. 산성.
개설
내용
산성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듯하다. 1237년(고종 34)에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이라고 하면서 봉기한 이연년(李延年)이 담양군과 원율현(原栗縣)을 거점으로 세력화하고서, 산 속에서 무리를 불러모아 촌락을 노략질하였다. 당시 이들은 원율현에 위치한 금성산성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이전인 1256년(고종 43)에는 몽골의 차라대 군대가 담양에 주둔하였는데, 이 때 금성산성은 담양, 광주 등 주변 지역민의 입보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외성과 내성의 2중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의 둘레는 2㎞, 내성의 둘레는 700m이다. 성곽의 높이는 3m 이내이며, 성벽에 사용된 돌은 화강암 이외에 특이하게도 주변에서 산출한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문터는 본성에 동서남북 4곳이 있고, 내성 2곳, 외성 1곳 등 모두 7곳이 있다. 4대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은 서문인데, 서문과 동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서문 남쪽에는 성벽을 3m 정도 터내서 만든 대형 수구(水口)가 있다. 건물터는 모두 16곳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 『금성산성-지표조사보고』(전남대학교박물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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