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9년(고종 46) 정월 강도(江都) 정부는 몽고군 원수부와 화평(和平)을 체결하기 위해 동계(東界)의 몽고병 주둔지에 사신 김기성(金器成)과 곽정유(郭貞有) 등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들 고려 사신은 몽고병과 합세한 동계 반민(叛民)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1259년 3월 몽고군에 사주된 동진국(東眞國) 군대가 등주(登州)와 화주(和州)의 반란한 고려 백성을 이끌고 춘주(春州) 천곡촌(泉谷村)에 이르자 신의군(神義軍) 병사 5명이 몽고군 원수 자랄타이〔車羅大〕의 사자인 것처럼 위장하고 그 진영에 들어갔다. 이들은 “고려 태자가 몽고에 입조하게 된 시점에 고려의 사자를 동계의 반민들이 살해하고 난동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하고 힐난하였다. 그리고 천곡촌에 이미 매복해 있었던 별초(別抄, 三別抄)를 불러들여 동진군(東眞軍)과 고려 반민을 포위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또한 강도 정부에서 보낸 국가 예물과 살해된 김기성 등 사신들의 유품을 회수해서 돌아왔다.
삼별초를 중심으로 천곡촌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1258년(고종 45)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를 계기로 동계 일대에서 확산되던 동계 지역민의 동요와 이반(離叛)을 저지하는 효과를 얻었다. 또한 1259년 4월 초로 태자 입조시기를 앞당기려고 고려조정을 압박하던 몽고 사신에 대응하여 김준 정권이 태자 입조시기를 몇 주 뒤로 미루면서 그들과 강화협상을 불리하지 않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