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구주성전투는 고려 후기 몽고 제1차 침략(1231) 때 구주성(龜州城)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구주는 고려 북계 내륙의 요충지이며 전략적인 거점이었다. 사르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은 내륙로를 확보하기 위해 온갖 공성법을 동원하여 구주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박서가 이끄는 고려군은 치열하게 항전하여 총 4회의 전투가 고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개경 정부의 강화 체결로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몽고군을 구주에 묶어놓아 남하하지 못하게 하여 몽고군 본진의 공격 속도를 늦추었으며 수세에 몰렸던 정부에서 강화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는 데 기여한 전투이다.
정의
고려 후기 몽고 제1차 침략(1231) 때 구주성(龜州城)에서 벌어진 전투.
역사적 배경
경과 및 결과
몽골군의 공격은 갖가지 공성법을 동원하여 1개월을 지속하였다. 누차(樓車)와 대상(臺床)을 만들어 이용하고 터널을 굴착하거나 기름으로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성을 압박하였다. 구주성의 고려군은 끓는 철액(鐵液)을 부어 누차와 대상을 불태워버리고, 진흙에 물을 적셔 불을 진화하여 적의 공격을 분쇄하였다. 퇴각하였던 몽골군이 10월 중순 신서문의 요해처 28개소에 포차(砲車)를 나란히 설치, 구주성 서쪽을 포격하였다. 포격으로 성벽이 무너질 때마다 박서는 무너진 성곽을 곧바로 수축케 함으로써 방어전을 유지하였다. 몽골의 구주에 대한 3차 공격은 11월 중순에 재개되었지만 구주성에서 포차로 완강히 저항하여 실패로 끝났다.
몽골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는 한편 구주성의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박서는 항복을 거부하였다. 4차 공방전에 해당하는 12월 중순경의 전투에서 박서는 대우포(大于浦)로 적을 저지시킴으로써 여전히 구주는 난공불락이었다. 몽골의 한 백전노장이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의 공방전을 여러 번 보았으나, 일찍이 이러한 맹렬한 공격에도 끝내 항복하지 않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탄식할 정도였으며 종국적으로 고려 측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구주성은 1231년 12월 개경정부가 몽골 측과 강화를 체결하고 사신을 보내 투항할 것을 독촉하자 1232년 1월에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의의와 평가
구주성의 승첩으로 인하여 구주는 국가로부터 포상받아 정원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구주성전투의 승리는 우리나라 수성전(守城戰)에서 안시성전투 다음으로 빛나는 승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통감(東國通鑑)』
- 『몽고침입에 대한 최씨정권의 외교적 대응』(강재광, 경인문화사, 2011)
- 『고려대몽항쟁사연구』(윤용혁, 일지사, 1991)
- 『대몽항쟁사』(유재성,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8)
-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강진철,『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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