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5년고려에 침입한 몽고의 제6차 침입군은 1256년(고종 43) 초에는 그 선발대가 전라도 남부지역에까지 도달하였다. 몽고군의 압해도 침공은 이 과정에서 야기되었으며, 강화도에 연결되는 서남해 연안해로의 차단이 침공의 주요 목적이었다.
압해도는 육지와 불과 3㎞ 떨어진 서남해안의 도서로서, 서남 연안해로의 간선로에 해당하는 해상 요충지이다. 1256년의 봄, 2월경압해도에 입보한 주현민들은 몽고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군선(軍船)에 대포를 설치하여 대비하였다. 이 대포는 석탄(石彈), 즉 돌을 멀리 쏘아 적을 분쇄하는 무기였다. 몽고군 원수 자랄타이〔車羅大〕가 지휘하는 주력군은 70여 척의 전함을 건조한 후 그해 4∼5월경 압해도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큰 대포가 장치된 고려 군선들이 대기하고 있어서 몽고 수군은 선제공격을 감행하지 못한 채 해상에서 머뭇거렸다. 전라남도 무안군 성내리의 다경진성지(多慶鎭城址)로 추정되는 언덕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자랄타이는 방향을 바꾸어 압해도의 다른 쪽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미 섬의 해안 곳곳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고 입보민들이 결사적으로 방어하였으므로 몽고군은 상륙전을 실행할 수 없었다. 압해도 입보민의 철저한 전투준비 상태를 확인한 자랄타이는 마침내 후퇴 명령을 내리고 북쪽으로 철군하였다.
압해도에 입보한 주현민이 몽고군의 해도침공을 막아냄으로써 서남해안으로부터 강화도로 이어지는 연안해로와 조운로(漕運路)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아울러 강도(江都) 이남 지역에 위치한 해도에 대한 몽고군의 추가적인 침공을 봉쇄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압해도전투는 군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 있어서 위기에 처한 강도조정을 구원한 전투였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