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현종의 후손으로 청화후(淸化侯) 왕경(王璟)의 아들이며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의 아우이다.
영녕공(永寧公)에 봉해진 뒤 1241년(고종 28) 왕명에 따라 왕자라 칭해졌다. 고관 자제 18인을 거느리고 독로화(禿魯花)가 되어 몽고에 갔는데, 추밀원사 최린(崔璘), 장군 김보정(金寶鼎), 좌사간 김겸(金謙)과 함께였다. 그 뒤 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성격이 원만해 오히려 몽고 황제에게 신임을 받았다.
1253년 몽고의 고려 침공계획을 눈치채고, 몽고사신이 고려에 오면 왕이나 태자 또는 안경공 왕창이 직접 맞아 호의를 베풀어 침해를 모면하라는 계책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최항(崔沆)이 듣지 않아 결국 몽고군이 쳐들어오게 되었다. 그 해 몽고의 야굴대왕(也窟大王)을 따라와 충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듬해에는 차라대(車羅大) · 홍복원(洪福源) 등과 함께 보현원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1255년에 다시 몽고 헌종의 명에 따라 차라대를 따라 고려에 쳐들어와 약 1년간 각지를 어지럽히고 개경을 위협했다. 이후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摠管)이 되어 2,000여 호를 하사받아 심주(瀋州)를 다스렸다. 1270년(원종 11) 임연(林衍)의 반란 때는 파병요청에 따라 원나라 세조의 명으로 강화상(康和尙) · 홍다구(洪茶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또 고려에 들어왔다.
인질로 원나라 동경(東京: 遼陽)에 우거(寓居)했을 때 총관(摠管) 홍복원이 불평이 많자 몽고황족 출신인 영녕공의 처가 황제에게 고해 홍복원을 죽였다. 이 일로 인해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와는 사이가 나빴는데, 뒷날 홍다구의 참소로 여러 차례 곤경을 겪었다.
원나라에 살면서 특히 충렬왕 때에는 왕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마다 왕옹(王雍)과 사공(司空) 왕희(王熙) 등 두 아들을 데리고 와 말을 바치고 왕을 알현하였다. 용모가 단아했고, 특히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책을 많이 읽어 지략이 뛰어나고 대의에 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