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당성(唐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초명은 홍복량(洪福良). 아버지는 1218년(고종 5)에 인주도령(麟州都領)으로서 몽고에 투항한 홍대순(洪大純)이다.
아들은 몽고의 관리가 된 홍다구(洪茶丘)·홍군상(洪君祥) 등 7명이고, 사위는 충렬왕 때 충찬치사(中贊致仕)에 오른 장위(張暐)이다. 선대부터 인주(麟州: 평안북도 의주 지역)에 옮겨 살았다.
1231년 인주의 신기도령(神騎都領)으로 있으면서 몽고가 침략해 오자 편민(編民) 1,500호(戶)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그 뒤 고려군민만호(高麗軍民萬戶)에 제수되었고, 몽고의 길잡이가 되어 고려를 침공하는 데 앞장섰다.
몽고가 북계(北界)의 40여 성(城)을 함락시킨 뒤에는 이 곳을 진수(鎭守)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232년 고려의 강화 천도에 대한 보복으로 살리타[撒禮塔]가 침공해 오자 북계를 근거지로 해서 협력하였다.
살리타가 처인성(處仁城: 지금의 경기도 용인)에서 사살당하고 몽고군이 철수했는데도 홍복원은 몽고의 구원을 기다리며 북계를 진수하였다. 다음 해에는 서경낭장(西京郎將)의 직함으로 필현보(畢賢甫)와 함께 선유사(宣諭使) 정의(鄭毅)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곧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에게 토벌되어 필현보가 죽임을 당하자, 몽고로 도망해 랴오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거처하였다. 이 때 몽고로부터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에 임명되었다.
거기서 전쟁 중에 몽고에 투항했거나 유망(流亡)해 간 고려인들을 통치하였다. 또한, 이들을 이끌고 몽고의 고려 침략에 합세해 1235년·1245년·1253년·1254년·1258년의 다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뚤루게[禿魯花: 볼모]로 몽고에서 머물던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과 귀부 군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258년에 죽임을 당하였다. 뒤에 아들 홍다구와 홍군상이 몽고에서 관인으로 출세함으로써 가의대부 심양후(嘉議大夫瀋陽侯)로 증직(贈職)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홍복원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랴오양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면서 고려와 대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