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중손 ()

배중손 사당(정충사)
배중손 사당(정충사)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장군으로서 삼별초의 항쟁을 주도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271년(원종 12)
본관
미상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장군
관련 사건
삼별초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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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배중손은 고려 무신정권기의 장군으로 삼별초의 항쟁을 주도한 무신이다. 1270년 고려 원종은 강화도에서 철수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는데 삼별초는 개경 환도를 거부하며 독자적 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본거지를 진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연합군이 여러 차례 진도를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71년 홍다구가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었고, 배중손도 이때 남도석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잔여세력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계속 항전하였다.

정의
고려후기 장군으로서 삼별초의 항쟁을 주도한 무신.
개설

배중손은 고려 무신정권기의 무신으로서 삼별초항쟁의 지도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배중손은 삼별초의 지휘관이었던 장군으로서 야별초(夜別抄) 지유(指諭)들을 포섭하여 1270년 삼별초항쟁을 이끌었으며 진도로 남천한 후 진도정권을 유지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역사에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의 경력은 자세하지 않다. 단지 임연(林衍)정권에 협조한 삼별초와 6번 도방(都房)에 소속되어 대몽강경파의 선봉에 섰던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

1270년(원종 11) 고려 원종몽골에서 돌아온 이후 강화도의 모든 문 · 무 관리들에게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엄명하여, 삼별초에 대해서는 강화도에서 철수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왕은 강제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삼별초는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형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몽골에 항복한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한 뒤 강렬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배중손은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강화도 주민들과 병사들의 이탈을 엄중히 방지하였다. 또한 섬 안에 있는 몽골인을 참수하여 단호한 대몽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강화도에 보관된 국고, 병기고를 접수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다.

배중손 등의 삼별초 지휘부는 부몽화된 개경정부가 몽골군을 끌어들여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새 정부 수립 3일 후에 전라도 진도로 본거지를 옮겼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은 수비병의 탈주와 민심의 동요로 인해 삼별초가 강화도를 포기한 것처럼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른바 ‘심입해도(深入海島)’는 김준∼임연정권 시기부터 대몽골 강경책이었던 해도재천도론(海島再遷都論: 海島再遷論)으로 이미 거론되었던 전략이었고, 배중손은 이를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진도로 항전의 거점을 옮긴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구축하고 용장사를 개조하여 궁궐과 관부를 지은 다음 진도를 황도(皇都)라 부르며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으며 대내외적으로 고려 황제를 받드는 자주적인 정부임을 천명하였다.

마침내 이 소식은 본토에도 전달되어 전라도 · 경상도의 주민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官奴)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삼별초는 해상 조운로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노획하여 재정에 충당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하여 토벌하게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단독으로 삼별초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몽골과의 연합을 꾀하기도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당시 고려군의 지휘관은 김방경(金方慶)이었고, 몽골군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아해(阿海)였으나 뒤에는 흔도(欣都)로 바뀌었다. 흔도는 몽골 황제 세조(世祖)의 조서를 배중손에게 전달하여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배중손은 몽골군이 철수하면 전라도를 자기의 영토로 삼아 몽골에 내부(內附)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배중손의 이러한 제안은 앞서 자비령 이북 서북면 60여 성을 들어 몽골에 항복한 최탄(崔坦)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들의 안위 문제였듯이, 항복보다는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위장전술 내지 지연전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진도 공략에 여러 번 실패하자, 이듬해인 1271년(원종 12) 5월에 홍다구(洪茶丘)가 몽골의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이에 김방경 · 흔도 · 홍다구 휘하 1만 2천의 여몽연합군은 격전 끝에 진도를 함락시켰다. 30여년 간 대몽항쟁의 선봉에서 활약해왔던 삼별초가 진도에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 것은 고려와 몽골정부의 유화책을 틈탄 속전속결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즉 고려 정부로서는 원종 자신의 왕권 회복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몽골로서는 일본 정벌을 단행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삼별초를 겉으로 회유하면서 조속한 시일 안에 진압하는 것은 공통의 중요한 현안이었던 것이다.

결국 삼별초가 세운 승화후 왕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이때 남도석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진도 함락 이후 배중손에 관한 어떤 소식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별초의 잔여세력은 진도 함락 이후에도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濟州道)로 본거지를 옮겨 2년간이나 더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1273년 제2차 여몽연합군의 공세를 받고 평정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事節要)』
『원사(元史)』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윤용혁, 일지사, 2000)
『대몽항쟁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8)
「고려 원종 11년(1270) 삼별초항쟁의 배경」(신안식,『명지사론』 13, 2002)
「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야(완)」(김상기,『진단학보』 13, 1941)
「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야(이)」(김상기,『진단학보』 10, 1939)
「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야(일)」(김상기,『진단학보』 9, 1938)
「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池內宏,『史學雜誌』 38-9, 1926)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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