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통정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진도의 삼별초의 항쟁과 관련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사망 연도
1273년(원종 14)
관련 사건
삼별초의 항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통정은 고려후기 진도의 삼별초의 항쟁과 관련된 무신이다. 고려 원종은 개경 환도를 명령했으나 삼별초는 따르지 않고 진도에서 저항하였다. 고려군과 몽골군이 합세하여 진도를 공격하자 김통정은 삼별초를 이끌고 탐라로 옮겨 갔다. 김통정의 삼별초는 탐라에 내성과 외성을 쌓고, 항파두리성이라고 불렀다. 원종은 김통정을 회유하기 위해 김찬 등을 보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1273년 여몽연합군이 탐라를 공략하여 항파두리성을 함락시켰다. 산중으로 들어간 김통정도 죽음을 맞이하였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일대에 항파두리성 유적이 남아 있다.

정의
고려후기 진도의 삼별초의 항쟁과 관련된 무신.
개설

김통정(金通精)은 진도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공략 당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탐라로 들어가 성곽을 쌓고 항거했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에게 패배해 1273년(원종 14) 윤6월 무렵에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 원종은 1270년(원종 11) 몽골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신료들에게 강화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령했으나 삼별초는 따르지 않았다. 장군 배중손이 야별초 지유(指諭) 노영희 등과 함께 강도에서 봉기하여, 삼별초를 거느리고 진도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옹립해 독자적인 정부를 만들어 저항했는데, 김통정도 이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과 흔도(忻都)가 이끄는 몽골군이 진도를 공략하자, 1271년 적장(賊將) 김통정이 삼별초의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탈출해 탐라로 들어갔다. 김통정의 삼별초는 탐라에 내성과 외성을 쌓아 웅거하면서 때때로 배를 타고 나와 주군(州郡)을 공략했다. 원이 시위친군천호(侍衛親軍千戶) 왕잠(王岑)을 보내 홍다구와 더불어 탐라정벌 책략을 의논하게 했다.

홍다구가 표문을 올리기를, 김통정의 당(黨)이 왕경에 많이 있으니 그들을 시켜 김통정을 회유할 수 있고,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공격해도 늦지 않다고 하니 몽골 황제가 따랐다. 이에 홍다구 혹은 원종이 김통정의 조카인 김찬〔金贊, 김영(金永)〕 등 5~7인을 탐라에 보내 회유했지만 김통정과 탐라 성주(星主)는 따르지 않아 김찬(김영)을 머물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1273년(원종 14)에 탐라를 공략하기 위해 여러 도(道)의 전함이 모였지만 바람에 파손되어 오직 전라도 선박 160척이 여몽연합군 1만명을 싣고 탐라로 향했다. 고려군은 김방경이, 몽골군은 흔도와 홍다구가 지휘했다. 김방경의 중군이 함덕포로 들어가 삼별초 복병을 물리치며 상륙했고, 좌군이 비양도(飛揚島)로부터 상륙해 삼별초의 보루(堡壘)를 곧바로 공격했다. 삼별초가 성(항파두리성) 안으로 퇴각해 저항했지만 여몽연합군이 성을 함락했다.

김통정이 70여명을 거느리고 달아나 산중으로 들어갔고, 삼별초의 장수 이순공(李順恭)과 조시적(曹時適) 등이 항복했다. 김방경이 삼별초 우두머리 김윤서(金允敘) 등 6인을 잡아 죽이고 친당(親黨) 35인을 사로잡았다. 흔도가 몽골군 500명을, 김방경이 경군(京軍) 800명과 외별초(外別抄) 200명을 탐라에 주둔시켰다. 김방경이 항복한 무리 1,300여명을 선박에 나누어 싣고 나주로 돌아와 사로잡은 친당을 목베고, 나머지는 모두 죄를 묻지 않았다. 김통정도 곧 죽음을 맞이한다.

상훈과 추모

김통정의 죽음에 대해 『고려사』 배중손전에는 ‘액사(縊死)’라고 되어 있는데 그가 목매어 자살한 것인지, 남에 의해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한 것인지 애매하다. 원 측의 기록에는 몽골군이 김통정을 사로잡아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사』 세가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원종14년(1273) 윤6월에 탐라주둔 장군 송보연(宋甫演)이 ‘적괴(賊魁)’ 김통정의 시체를 얻어 아뢰었고, 또한 ‘적장(賊將)’ 김혁정(金革正) · 이기(李奇) 등 70여명을 수색해 사로잡아 홍다구에게 보내니 그들을 모두 죽였다. 『원사』 세조 본기에는 지원(至元) 16년 8월에 해적(海贼) 김통정이 죽고 그 종자(從子) 왕온(王溫)을 획득했는데 유사(有司)가 법대로 논죄하려 하자 황제(세조)가 김통정이 이미 죽었다며 용서했다고 되어 있다.

지원 16년은 1279년(충렬왕 5)에 해당하므로 이 때 김통정이 죽었다기보다 왕온이 잡힌 것에 초점이 두어진 기사로 보인다. 탐라주둔 고려군이 삼별초 우두머리 김통정의 시신을 발견했으니 김통정은 고려군이나 몽골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살했거나 내부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김통정은 이렇게 죽었고, 그와 함께 도망쳤던 70여명은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김통정이 붉은오름(애월읍 광령리 소재)에서 자살해 이곳이 붉은 피로 물들어 이 오름 명칭이 유래했다고 한다. 김통정의 삼별초가 쌓은 내성과 외성은 ‘항파두리성’이라 불려져 왔으며 그 유적이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일대에 남아 있다. ‘장수물’이 항파두리성 바깥 인근에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김통정이 이 성을 탈출하면서 뛰어내린 곳에 발자국이 패여 샘물이 솟아난 것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원고려기사(元高麗紀事)』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윤용혁, 일지사, 2000)
「송징과 김통정: 삼별초의 민중영웅」(윤용혁, 『한국중세사회의 제문제』, 한국중세사학회, 2001)
「김통정 관련 서사물에 투영된 역사인식」(오대혁, 『설화와 역사』, 집문당, 2000)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