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중성 ()

건축
유적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과 선원면 일원에 있는 고려후기 강도시기에 축조된 성곽.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과 선원면 일원에 있는 고려후기 강도시기에 축조된 성곽.
개설

강화 중성(江華 中城)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성으로, 강화군 강화읍과 선원면 일원에 걸쳐 있다.

역사적 변천

고려는 1232년(고종 19) 6월 몽골군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 중성의 경우, 1250년(고종 37)에 축조한 성으로 총 길이는 약 9㎞로 추정되며, 내성과 외성이 조선시대에 수차례 개축된 것과 달리 개축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 중성은 1986년 4월 1일 강화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고,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축적됨에 따라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내용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방어 요새로 구축하고자 하였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강화의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방어 체계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 약 1.2㎞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34년(고종 21) 1월부터 축조되었다. 중성은 둘레 약 9㎞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50년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도 섬을 두른 토성으로 1233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이 세 개의 성은 1259년(고종 46)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모두 헐렸다.

강화 중성은 북산의 북장대에서 남산의 남장대까지는 강화산성과 중첩된다. 다시 북쪽으로 북장대에서 옥림리의 옥창돈대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남장대에서 신정리의 신대이 마을의 뒷산까지 연결된 총 길이 9㎞에 달하는 성이다.

특징

강화 중성은 기본적으로 기초 부분에 기단 석축을 배치하고 중심 토루(土壘)와 내외피 토루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기저부의 기단 석축열은 지형의 경사도에 따라 내·외측 석축열 간 높이차를 다르게 하였으며 평면 형태는 바깥 면은 직선, 안쪽 면은 물결 형태로 조성하였다.

강화 중성에는 17개의 대소문(大小門)이 있었는데, 그 중 대문 8개는 모두 개경에 있던 성문의 이름을 본따서 명명하였는데, 동쪽의 선인문(宣仁門), 서쪽의 선기문(宣祺門), 남쪽의 태안문(泰安門), 북쪽의 북창문(北昌門), 동남쪽의 장패문(長覇門), 서남쪽의 광덕문(光德門), 서북쪽의 선의문(宣義門), 동북쪽의 창희문(彰熙門) 등이 있었다.

의의와 평가

강화 중성은 강화를 요새화하여 국난을 이겨내고자 한 고려의 의지가 담겨 있는 항몽 유적 중 하나다. 현재 강화 중성의 범위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견이 있으나, 발굴 성과가 축적됨에 따라 향후 실체 규명이 기대되고 있다.

참고문헌

『인화~강화 도로건설공사 J구간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 강화 옥림리(玉林里) 유적: 강화중성 및 고려시대 건물지』(중원문화재연구원, 2012)
『강화 중성유적: 강화군 창리~신정간 도로 확·포장공사구간 내 발굴조사 보고서』(인하대학교박물관, 2011)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육군박물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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