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사용하던 궁궐터다.
1232년(고종 19) 6월 강화에 궁궐을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이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그러나 1270년(원종 11)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강화 고려궁은 정궁의 지위를 잃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 자리에 건물과 외규장각(外奎章閣) 등이 건립되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해인 1232년(고종 19) 6월에 창건되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 궁궐을 지었다고 하였다. 강화도에 국왕과 왕족, 관료와 백성들이 옮겨왔기 때문에 궁궐과 관부가 필연적으로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도에는 정궁 이외에도 행궁(行宮) · 이궁(離宮) · 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궁궐을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궁의 정문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강화 고려궁은 1270년(원종 11)에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 1631년(인조 9)에 고려궁지에 행궁을 건립하여 국난시 이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강화유수부, 외규장각, 장녕전(萬寧殿), 만녕전(萬寧殿)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었다. 현재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명위헌(明威軒), 이방청(吏房廳) 등과 복원된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는 이름으로 사적 지정이 되어 있으나, 실제 고려 궁궐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조선시대 관아 건물 몇 채만이 잔존해 있으며 복원된 외규장각이 있을 뿐이다. 한편 강화 고려궁지의 위치와 범위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고, 현재도 논의가 진행 중이다.
비록 국난을 피하여 천도를 한 시기이기는 하지만 고려시대 정궁이 있던 자리로 의미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관아 건물 등으로 사용되며 지방 통치에 이용된 장소이며, 정조가 추진했던 개혁의 일환이었던 외규장각이 건립된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며 외침으로 인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