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전성(江華塼城)은 조선 영조 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㷜)이 벽돌로 쌓은 성으로,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토성 위에 쌓았다. 현재 강화 외성(江華 外城)의 일부 구간에 해당된다.
고려는 1232년(고종 19) 6월 몽골군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 외성의 경우, 1233년(고종 20)부터 축조한 성으로 그 길이가 약 23㎞(적북돈대∼초지진)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강화 전성은 유수 김시혁이 건의하여 1743년(영조 19)부터 1744년(영조 20)까지 오두돈대 주변의 외성을 벽돌을 이용하여 개축하였다.
강화 전성은 1972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가 강화군을 경기도로부터 편입하며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한편 강화 외성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 10월 25일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강화 외성이 사적으로 승격될 때, 강화 전성 역시 강화 외성의 일부라고 판단되어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에서 해제되었다.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방어 요새로 구축하고자 하였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강화의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방어 체계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 약 1.2㎞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34년(고종 21) 1월부터 축조되었다. 중성은 둘레 약 9㎞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50년(고종 37)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도 섬을 두른 토성으로 1233년(고종 20)부터 쌓기 시작하여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이 세 개의 성은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모두 헐렸다.
조선시대에 들어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保障地)로 주목받으며 강화의 관방 시설이 수차례 정비되었다. 국난시에 도성의 외성으로서의 역할이 중시되어 1618년(광해군 10)에 보수된 바 있고, 병자호란(1636~1637) 때 허물어진 것을 다시 쌓고 돈대를 설치하였다. 영조 때에 강화유수 김시혁이 청의 번벽법(燔甓法)을 도입하여 벽돌을 구워 오두돈 일대의 외성을 정비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강화 전성이다.
강화 전성을 포함하는 강화 외성의 길이는 약 23㎞이고, 그 중 강화 전성은 약 270m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래쪽은 돌을 다듬어서 쌓고 위쪽은 벽돌을 8~10단으로 쌓아 올렸는데, 벽돌은 강회붙임으로 연결하고 어긋매김 공법으로 축조하여 허물어짐을 방지하였다. 관리 소홀로 허물어진 채 있던 강화 전성을 현대에 들어 재정비하였다.
강화 전성은 수원 화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축성(塼築城)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특히 강화 전성은 1794년에 축성하기 시작한 수원 화성보다 50여년 정도 이른 시기에 축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