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재상은 중서문하성의 문하시중·평장사·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 등 5재(宰)와 추밀원의 판추밀원사·추밀원사·지추밀원사·동지추밀원사·추밀원부사·첨서추밀원사·직학사 등 7추(樞)를 가리킨다. 따라서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이 재상의 관부가 되었다.
그런데 중서문하성의 재신이 백관의 서무를 관장하고, 추밀원의 추신은 군기(軍機)를 관장하도록 되어 있어 직무가 서로 달랐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재신과 추신들이 합좌해 국가의 중요 정책을 의논하고 결정했으므로 양자를 구분하지 않고 흔히 재추(宰樞), 또는 양부재상(兩府宰相), 양부 등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중서문하성은 고려 초의 광평성(廣評省)에서 비롯해 982년(성종 1)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을 거쳐 1061년(문종 15)에 중서문하성으로 개칭되고 직제가 정비되었다. 추밀원은 991년(성종 10)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숙위(宿衛)를 위한 관청으로 중추원(中樞院)이 설치되었다가 문종 때 직제가 정비되면서 재부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1095년(헌종 9) 추밀원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양부 체제가 성립한 것은 중추원이 재부로 승격된 문종 때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는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으로 중서문하성이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이 밀직사(密直司)로 각각 개편됨으로써 첨의부·밀직사를 양부라 부르게 되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밀직사를 폐지했다가 곧 회복했고, 1310년(충선왕 2)에는 밀직사의 품질을 높여 첨의부와 함께 양부를 칭하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밀직사가 한 때 양부의 지위에서 탈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로는 첨의부·밀직사의 양부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관제의 개편에 따라 1356년(공민왕 5)에는 중서문하성·추밀원으로, 1362년에는 도첨의부·밀직사로, 1372년 이후로는 문하부(門下府)·밀직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