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제는 국가통치조직의 관리·운영에 관한 기술적 구조의 일정한 양식 또는 그것을 구비한 조직형태이다. 관료제라고도 한다. 전근대사회에서는 특권층을 구성하던 관리 집단이 통치조직의 성격을 띠었다. 근대 이후에는 의회민주주의의 발전과 권력관계의 사회화 현상에 따라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제와 입법기관으로서의 대의제로 이원적으로 구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족국가의 통치조직에서 출발하여 고대국가의 부족연맹체 통치조직,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통치조직, 전문화되고 합리적 이념으로 기능하는 근대의 통치기구로 발전해 왔다.
관제 또는 관료제는 한 국가의 거대한 지배권력기구로서, 전근대사회에 있어서는 일정한 특권층을 구성하고 있던 관리의 집단이 정치권력의 주된 담당자로서의 지위를 형성하며 통치구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의회민주주의의 발전과 권력관계의 사회화현상에 따라 국가의 통치조직은 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제와 입법기관으로서 대의제가 이원적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관료제는 위계제(位階制)와 관리상의 전문성과 기술합리성을 지닌 대규모 조직으로 변천하였으며, 이러한 의미의 관료제 현상은 비단 국가조직에만 국한되지 않고 대규모의 형태를 지닌 모든 사회집단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의 통치구조의 일종으로서 관제 또는 관료제가 역사적으로 고대 부족국가의 통치조직에서 출발하여 고대국가의 부족연맹체의 통치조직,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통치조직에서 점차로 전문화되고 합리적 이념으로 기능하는 근대의 통치기구로 발전하여왔다. 어느 경우에건 관제 또는 관료제는 한 국가의 거대한 정치권력기구이기 때문에, 국가의 시대적 · 사회적 환경에 따라 특정 사회계층을 토대로 관리집단을 형성하여 실질적 공리를 추구하는 조직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 나라 관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부족국가 단계의 통치조직은 지극히 빈약한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제외한다면 대체로 삼국시대부터 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우리 고대국가의 성립에 있어서는 대외적으로는 중국문화의 지배에서 이탈함과 동시에 다투어 일어난 다른 새외민족(塞外民族)과의 충돌에서 패배하지 않아야 한다는 두 가지 과제가 부과된 것이었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각 처의 족장들이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조속히 만들어 나가느냐, 또는 지배체제 성립의 입각점을 어디에서 발견하느냐 하는 문제와 그러한 정치체제에 상응하는 사회체계의 정비를 위한 진통을 이겨내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관료제는 고대국가의 성립 이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귀족정치시대, 그리고 조선의 양반정치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근대화되어 왔으며, 이러한 오랜 시대의 전개와 시련을 거치는 동안 구조상으로나 문화적으로 특수한 전통과 체질을 유지하여 온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관료제는 지정학적 특수성과 타율과 자주가 교차되어 온 민족사의 한 반영인 권위주의적 특성에서 근대화과정이 지체되었으며, 민족항일기에는 식민지배의 도구장치로서 이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 형식상이나마 근대적 관료제가 싹트는 것은 한말 개항 이후 외세에 의한 반타율적 근대화과정에서의 일련의 관제개혁에서 비롯되었고, 관료제가 자주적 역량에 의해 추진된 것은 그 뒤 광복을 계기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난 건국 이후라 하겠다. 사실상 광복 후의 관료제가 그 내부에 온존하는 오랜 전근대적 인습과 식민주의의 잔재를 떨쳐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의 관료제는 광복 후 국토가 분단되어 북한의 위협을 받고 있는 긴장된 정치상황하에서 그 체질을 개혁하면서 고도경제성장과 근대화과업을 주도해 왔기 때문에 그 나름의 특성을 살펴볼 가치가 있다.
고구려는 일종의 전사조직체(戰士組織體)의 성격을 띤 5부족이 모체가 되어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초기적인 국가통치기구로서의 관제가 있었다. 중앙에 왕이 있고, 그 밑에 직속된 왕족과 왕비족, 그리고 전 왕족인 소노부(消奴部)의 적통대인(適統大人) 등에게는 고추가(古雛加)라는 존칭이 주어졌다.
또 왕 아래에는 부족장인 상가(相加)가 있으며, 상가는 그 아래에 사자(使者) · 조의(皁衣) · 선인(先人, 仙人)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왕도 상가와 마찬가지로 사자 · 조의 · 선인 등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부족장의 지배기반 위에서 성립한 것을 보여주나, 다만 왕에게는 이와 별도로 패자(沛者) · 대로(對盧) · 주부(注簿) · 우태(優台) 등의 관계를 마련하고 있다. 이는 곧 중앙부족의 지배력이 강력함을 말해 주는 동시에 왕이 다른 4부를 영도함에 필요한 지배기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 초기의 관제는 족장세력을 기반으로 한 부족연맹국가적 색채가 많이 남아 있었다.
한편, 중앙관제와는 별도로 그들 부족 내부의 사무처리와 세력관리를 위하여 독자적으로 사자 · 조의 · 선인 등의 관직을 둘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는 국가체제를 점차로 정비하여 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고구려 초기의 관직에 종사하던 1만여 인의 사관계급(士官階級)은 일반민들과는 다른 관모와 의복을 착용함으로써,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과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 한족(漢族)에 대한 투쟁세력으로 먼저 대두하여 북방에서 충분히 자립성을 가지면서 고대국가를 성립시켰다. 이는 곧 한족의 동방침략에 대한 방파제의 구실을 한 것이고, 남방에서 백제나 신라가 성립할 가능성과 여유를 준 것이다.
발전기나 성숙기를 거쳐 후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에는 연장자 내지는 가부장적 족장의 뜻을 지닌 형계열(兄系列)의 관직이 대두되는데, 이는 종래의 족장세력이 집권적인 왕권 아래 통합, 편제되는 과정에서 각기 그들의 족적 기반의 차이에 따라 개편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조부(租賦)를 거두어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사자계열(使者系列)의 관직이 대두하는데, 이는 행정적인 관리 출신이 그들의 지위에 따라 여러 관등으로 분화, 편제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고대국가로 전환, 발전해 나가면서 성격이 다른 두 개의 계열이 하나의 관등체계 안에 통합, 편제되어 갔으며, 말기에는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① 대대로(大對盧), ② 막리지(莫離支, 莫何何羅支) 또는 태대형(太大兄), ③ 주부(主簿, 鬱折), ④ 대부사자(大夫使者, 謁奢), ⑤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등 5인이 각기 1품 · 2품 · 종2품 · 정3품 · 종3품 등의 관계(官階)를 이루는 정치의 추요부(樞要部)를 형성하였다. 이 밖에 ⑥ 대사자(大使者, 大奢, 정4품), ⑦ 대형가(大兄加, 정5품), ⑧ 발위사자(拔位使者, 儒奢, 종5품), ⑨ 상위사자(上位使者 또는 乙奢, 정6품), ⑩ 소형(小兄, 失之, 정7품), ⑪ 제형(諸兄, 종7품), ⑫ 과절(過節, 정8품), ⑬ 부과절(不過節, 종8품), ⑭ 선인(先人 또는 庶人, 정9품) 등의 관계가 있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관제는 족장세력들을 중앙통치조직에 흡수, 통합하여 재편성하고, 그 지배영역을 확대하면서 정비한 고대적 왕권관제체제였다.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정비된 정치조직을 갖추었다. 그것은 처음 백제의 지배집단이 북쪽으로부터 내려와 토착기반이 미약했기 때문에 강력한 지배조직의 구성이 필요하였고, 또한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일찍부터 중국의 발달된 정치제도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결과 마련된 정치조직으로는 16등 관계와 육 좌평제, 그리고 궁내관서로서 12개 부의 내궁(內宮:宮內府)과 중앙정무관서로 보이는 10개 부의 외궁(外宮:政務官署) 등을 두고 있다. 백제 관제의 기반이 된 16등 관계를 이들 각 관계간의 차등을 나타내는 복식제와 관련시켜 보면 〈표 1〉과 같다.
등급 | 관계명 | 복색 | 관식 및 의대 |
---|---|---|---|
1 | 佐平 | 紫衣 | 銀花飾冠 紫帶 |
2 | 達率 | ||
3 | 恩率 | ||
4 | 德率 | ||
5 | 扞率 | ||
6 | 奈率 | ||
7 | 將德 | 緋衣 | 紫帶 |
8 | 施德 | 皁帶 | |
9 | 固德 | 赤帶 | |
10 | 季德 | 靑帶 | |
11 | 對德 | 黃帶 | |
12 | 文督 | 靑衣 | |
13 | 武督 | 白帶 | |
14 | 佐軍 | ||
15 | 振武 | ||
16 | 剋虞 | ||
〈표 1〉 백제의 16등관계 |
다음 육좌평 관계조직은 왕 밑에 수상격으로 왕명출납을 관장한 내신좌평(內臣佐平), 재무를 맡은 내두좌평(內頭佐平), 예식과 외교를 맡은 내법좌평(內法佐平), 숙위를 맡은 위사좌평(衛士佐平), 사법을 맡은 조정좌평(朝廷佐平), 국방을 맡은 병관좌평(兵官佐平) 등의 관제로 구성되었다. 그 운영에 있어 내신좌평은 총재 또는 상좌평으로서 군국정사를 주재하고 육좌평이 합좌, 의논하는 귀족회의의 의장으로서 국무를 총괄하였다.
육좌평의 귀족회의는 상좌평의 주재하에 내관12부(內官十二部)와 외관10부(外官十部)의 업무를 총괄적으로 협의, 검토하여 왕에게 귀일시켰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백제의 중앙관서에는 부중(府中)과 궁중의 구별이 있었고, 중앙의 육좌평제는 일견 육전조직(六典組織)의 모습을 방불하게 하였으며, 또한 어느 정도 문무의 구분관념이 생긴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중신들이 합좌하는 귀족회의로서 국무를 총괄하고 임기제도로서 중진을 민주적으로 선거하는 등 민주적 위풍도 엿볼 수 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매우 정비된 것 같으나 백제의 관제는 어떤 족적 기반이나 토착의 전통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전혀 이질적인 외래 관제를 도입한 것이기 때문에, 지배영역의 확장 없이 정비된 백제의 관제는 자국의 여러 여건의 변동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에는 전체적인 붕괴를 면할 수 없었다. 결국, 백제의 관제는 토착 기반이 약하고 주체적인 건전성이 결여되어 지속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사씨(沙氏) 등 8대 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의 견제에 의한 왕권의 약화와 족적 전통을 바탕으로 대두하는 귀족세력의 분열 등은 그 형식적 지배체제 관제의 붕괴를 촉진하는 작용을 하였다.
신라는 삼국 사이의 항쟁과 통일과정에서 고대국가로 성장, 발달하였는데, 지배부족세력의 성장과정에서 부족간의 통합으로 종국에는 박 · 석 · 김의 세 성이 대두하였으며, 이들 종족 중심의 정치적 지배세력의 분포는 마침내 골품제도를 성립시켰다. 신라의 골품제도는 지배계급으로서의 벌족세력을 어느 한도에서 제한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골품제도는 종족의 뿌리를 가리키는 골(骨)과 관계를 가리키는 품(品)을 합쳐서 이르는 것으로 신라관제의 기간이 되고 있으며, 관계제와 상호 연관되어 신라의 17등 관계제도를 형성하였다.
신라의 중앙관부는 고대국가로 발전함에 따라 점차 정비, 확대되었는데, 법흥왕 · 진흥왕대로부터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 신문왕대에 그 대체적인 정비를 보았다. 중앙관부 중 주요 설치연대와 직무는 다음 〈표 2〉와 같다.
연대 | 관부명 | 직무 | |
---|---|---|---|
법흥왕 | 3년 | 兵部 | 군사 |
18년 | 上大等 | 중앙귀족회 의장 | |
진평왕 | 3년 | 位和府 | 관리인사관계 |
6년 | 調府 | 貢賦 | |
6년 | 乘府 | 鹵簿 사무 | |
8년 | 禮部 | 外交儀禮 | |
43년 | 領客府 | 외빈접대 | |
46년 | 大道署 | (?) | |
47년 | 尙舍署 | 논공행상 | |
진덕왕 | 5년 | 執事部 | 국가기밀사무 |
5년 | 倉部 | 조세창고사무 | |
5년 | 左理方府 | 形律事務 | |
5년 | 音聲府 | 궁중음악 | |
무열왕 | 4년 | 大日任典 | 원시종교관계 |
6년 | 司正府 | 규탄사무 | |
문무왕 | 7년 | 右理方府 | 形律事務 |
17년 | 左司祿官 | 녹봉사무 | |
18년 | 船府 | 수군 | |
21년 | 右司祿官 | 녹봉사무 | |
신문왕 | 2년 | 工商府 | 器皿製造 |
2년 | 國學 | 한학교육 | |
6년 | 例作府 | 영선사무 | |
성덕왕 | 12년 | 典祀署 | 제사사무 |
17년 | 漏刻典 | 시간관측 | |
31년 | 京城困作典 | 修城事務 | |
〈표 2〉 신라의 역대 주요관부 |
신라의 중앙관부는 〈표 2〉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국가적인 발흥기에 해당하던 법흥왕 · 진평왕 · 진흥왕대로부터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 신문왕대에 대체로 정비되었다. 진평왕대에 그 기반을 구축한 뒤, 651년(진덕왕 5) 상대 말기에 국가의 최고행정기관인 집사부(執事部)가 설치되어 이를 중심으로 행정력이 강화되고 집행체제를 가다듬었다.
그 뒤 신문왕대에 이르러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해서 왕실의 전제권을 강화하고 지방을 통합하는 동시에, 비로소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의 육전체제를 정비함으로써 관제의 큰 발전을 보았다. 516년(법흥왕 3)에 주요 중앙관서로서 병부와 상대등이 설치되었고, 520년에는 백관의 공복(公服)과 복색을 제정하고, 그 무렵 중앙의 이벌찬 등 17관계가 정비되는 등 관제의 기반이 형성되어 갔다.
585년(진평왕 7)에 군주소재궁인 대궁(大宮)과 박씨본궁인 양궁(梁宮), 그리고 김씨본궁인 사량궁(沙梁宮) 등 세 궁에 각각 사신(私臣) 1인을 두었던 것을 622년에는 그것을 내성(內省)으로 통합하여 내성의 사신[殿中令]으로 하여금 삼궁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내성은 왕실의 재정과 전장노비(田莊奴婢)를 관장하는 정식기구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정과 구별되는 궁내성(宮內省)이 분화되어, 왕권의 강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왕권과 귀족회의간의 세력균형이 깨져갔다.
그 뒤 651년에 집사부가 설립되어 왕명을 집행하는 핵심기구로 등장하자 왕권에 예속된 중시(中侍:수상의 지위에 해당)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귀족권을 대표하는 상대등의 지위와 권한이 약화되어, 결국 통일신라의 정치체제가 가일층 전제화되었다. 그리고 682년(신문왕 2)에는 국학이 설치되어 유교적 소양을 갖춘 자를 관리로 등용하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으며, 신라의 유교정치사상은 전제군주의 덕인 ‘ 인(仁)’과 신하의 본분인 ‘ 충(忠)’을 강조하는 지배층의 정치이념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신라통일기의 중앙관제는 점차 그 지배영역을 확장하면서 얻어진 정치적 · 사회적 경험을 정리하면서 성립한 것이었다. 그 특색을 보면 첫째 동양의 전형적인 관제체제인 육전체제 운영의 방향을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둘째 신라의 밀도 높은 문화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기술관 계통의 관직이 강화되었으며, 셋째 내성 및 왕실의 주요 경제기반인 각사 성전(各寺成典)이 성립되었으며, 넷째 행정통제와 관리감찰기구가 강화되었는데, 좌우 이방부(左右理方府) · 사정부(司正府) · 외사정(外司正) 등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유민들로 형성된 발해의 지배층은 당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삼성육부제를 두었는데, 정당성(政堂省) · 선조성(宣詔省) · 중대성(中臺省)의 삼성과 충부(忠部, 吏) · 인부(仁部, 戶) · 의부(義部, 禮) · 지부(智部, 兵) · 예부(禮部, 刑) · 신부(信部, 工)의 육부였다.
권력구조면에서는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大內相)이 선조성의 장관인 좌상(左相)과 중대성의 장관인 우상(右相)을 통할하였는데, 수상과 같은 지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방제도는 5경 15부 62주이며, 5경은 상경 · 중경 · 동경 · 남경 · 서경이며,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5도의 교통망을 정비하고 15부가 지방행정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으며, 촌락은 토착인인 수령이 관장하였다.
고려는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재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연합국가의 형식으로 성립되어 광종대의 중앙집권적 개혁을 거쳐 성종대에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문종대를 거쳐 원숙한 관제를 갖추게 된다.
광종은 호족세력의 군사적 기반 등을 약화시키기 위해 956년(광종 7)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고, 문치주의로 전환하여 958년 유교적 소양과 능력을 위주로 관료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새로운 정치기준을 제시하였으며, 이어 새로운 관료체계의 안정을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는 등 왕권강화를 위해 힘썼다.
이러한 광종의 개혁을 추진시킨 사상적 기반은, 우선은 『정관정요(貞觀政要)』 등을 통한 유교정치이념의 이해와 천태종 · 법안종을 통해 교(敎) · 선(禪)을 통합하려는 노력에 입각하고 있었다. 즉, 이러한 식견과 사상적 기반 위에서 세대교체와 체질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개혁과 제반 문화의 건설이 가능했다. 당시의 정치개혁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의 「 시무28조」의 건의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불교나 풍수지리적 사상기반의 병폐에서 탈피하여 보다 실용적인 유교적 논리를 주체적으로 활용하여 국리와 민복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귀족기반 위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성종 때의 중앙관제의 개혁은 976년(경종 1)의 전시과제(田柴科制)의 실시로 그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또 내외의 관제가 대폭 확장 정비된 978년(목종 1)에 18과로 분류된 품계를 기준으로 전시지(田柴地)를 분급하도록 전시과를 개정하여 중앙관료의 귀족적 기반이 확인됨으로써 정착될 수 있었다. 이어서 현종대를 거쳐 문종대에 이르러서 완성되었으며, 후기에는 무신집권기와 원나라의 지배기,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사회전환기를 거치면서 변화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고려 중앙관제의 골간은 당나라 및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관제와 고려의 독자적인 관제라는 세 가지 계열의 관제를 중심으로 정비, 형성되었으며, 그것은 최고고문격인 삼사(三師) · 삼공(三公)과 삼성(三省:中書省 · 門下省 · 尙書省) · 육부(이 · 병 · 호 · 형 · 예 · 공부) · 중추원 · 어사대 · 삼사(三司), 임설적 합좌회의기구인 도병마사 · 식목도감(式目都監), 그리고 무신집정기의 중방(重房) 및 정방(政房)과 그 뒤의 도평의사사, 즉 도병마사의 추신으로서 상설기구화한 도당(都堂)으로 되어 있었다.
삼성[宰府]과 중추원[樞府]은 양부(兩府) 또는 재추(宰樞)라고도 부르며, 고려관제의 골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양부의 고관, 즉 재신(宰臣)과 추신(樞臣)이 함께 모여 국가의 중대한 정사를 합좌하여 결정짓는 임설기구를 도병마사 · 식목도감이라고 하였다. 고려의 중앙관제에서 삼성체제는 당나라의 제도를, 중추원과 삼사는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고, 도병마사 · 식목도감은 고려의 독자적인 제도였다. 이러한 세 계통의 제도가 어떻게 기능하였는가에 따라 고려 중앙정치구조의 주된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삼성간의 관계를 보면, 중서성 · 문하성 · 상서성이 병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서성과 문하성이 단일화되어 중서문하성으로 되었고, 상서성은 상서령(尙書令)이 허직(虛職) 또는 명예직화하여 실질적인 최고관직인 좌복야(左僕射) · 우복야(右僕射)가 정2품이지만 재신에 들지 못함으로써, 기능면에 있어서는 중서문하성에 종속된 감이 짙어 결국 삼성은 실제 기능면에 있어서 일원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성을 당나라의 삼성과 비교하면 먼저 상서육부(尙書六部)의 서열이 당나라의 경우 이 · 호 · 예 · 병 · 형 · 공부의 순인데 고려는 이 · 병 · 호 · 형 · 예 · 공부의 순으로 되어 있고, 그 속사(屬司)에 있어서는 당나라에는 육부에 각 4사(四司)씩 모두 24사가 있었으나, 고려는 성종 때에 9사를 두었다가 현종 때에 이르러 이부의 고공사(考功司)와 형부의 도관(都官)만 남기고 나머지는 혁파하였기 때문에 결국 2사만이 존재했던 점 등이다. 이는 당나라의 제도를 고려의 사정과 사회구조에 맞게 수정하여 적용한 것이라 하겠다. 또 육부가 직접 왕과 연결되어 독립성이 강했으며, 중서문하성도 성재(省宰)와 낭사(郎舍)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어 왕권의 강화에 유리했던 점도 한 특징이다.
중추원과 삼사는 송나라의 제도를 수용한 것이었는데 중추원은 상서병부와 도병마사가 정상적으로 기능한 전기에는 군기사(軍機司)의 기능보다 왕의 측근직으로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선(承宣)과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추신이 구조적으로 이원화되어 형식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다가 후기에는 도당의 그늘에 가려 제구실을 못하였다. 삼사 또한 상서호부(尙書戶部)가 전기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하여 국가 재정의 기본업무를 관장하였으므로 형식화된 단순한 회계기관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었고, 후기에는 도당에 의해 허설화(虛設化)되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고려의 독자적인 기구로서, 도병마사는 변방의 중대사를 회의하는 재추 중에서 임명된 판사(判事)와 사(使), 그리고 부사(副使) · 판관(判官)의 합좌기관이었으며, 식목도감은 법제나 의전을 협의, 결정하는 기관이었다. 이들은 후기에 이르러 재상권(宰相權)이 강화됨에 따라 도평의사사, 즉 도당으로 개편되어 국가권력이 이곳에 집중되어 국정의 최고 핵심기구가 되었다.
지방제도의 변천과정은 중앙권력에 의한 지방통제의 강화의 방향, 즉 중앙집권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고려 지방제도의 특성은 중간기구의 미숙성 및 그 극복과정에 따른 변화인데, 이는 전기에는 몇몇 제한된 기능만을 대행하던 주목(主牧)에서 체제를 갖춘 중간기구로서의 안찰사로 정립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많은 점과 외관의 수가 적은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외관의 증치과정 및 향 · 소 · 부곡의 소멸과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한편으로 중간기구의 미숙성과 관계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은 재상권의 변질과정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호족연합정권의 성격을 띤 고려왕조가 그 체제를 정비한 뒤 대체로 무신집권 이전까지는 제도적인 면에서 재상권에로의 집중적인 일원화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국왕과 직결된 육부 중심의 행정체계와 여러 정치기구의 정상적인 기능 및 운용,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병립, 그리고 그 기구의 이원적 구조와 재추단(宰樞團)의 의정기관이 일원화되지 않은 점 등에서 실증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재상권의 강화에 유리한 점도 많았다. 우선 재추의 관직에서 연유한 것으로 본사(本司)에서 시무(視務)를 하고 상서육부의 판사나 상서를 겸하며, 식목도감과 도병마사의 회의원에 임명되는 것 등이 있고, 다음 보다 중요한 것으로는 구체적인 정치기구를 초월하여 국가의 중요 정책을 입안, 결정하는 권한이 재추에 있었던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상권은 중앙의 문벌귀족이 점유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관인귀족사회의 한 단면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점은 관료의 처벌방법으로 귀향이 무거운 벌이었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전기에는 이상과 같은 재상권이 강화될 여러 소지가 있었으나, 관직의 기능분화에 의한 상호 견제 등으로 왕권과 재상권의 균형이 유지된 비교적 안정된 권력구조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무신란 이후 국가의 행정기구를 그대로 둔 채 무인의 독자적인 집정기구인 정방(政房)을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된 데 이어 몽고간섭기로 접어들면서 재상권이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제도적인 일원화를 보게 되자 다른 관서는 허설화되고 왕권도 그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재상의 주류를 흔히 권문세가라고 하는데, 무인집정기에 문(文)과 함께 이(吏)를 중요시한 것 등의 영향 및 사회변동과 연결되어 현직의 관직을 보다 중요시하여 그들은 재추의 관직을 가지고 도당이라는 정치기구를 통해서 집단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는데, 그만큼 관료로서의 성격이 강해진 것이다. 이는 조선조의 관인 중심의 사대부사회로 이행하는 중간적 기능을 한 것이라 하겠다.
이상을 종합하면 고려의 정치제도는 호족세력의 강한 압력 아래 왕권을 강화하려는 입장에서 당나라 및 송나라의 제도가 필요에 따라 변형, 수용되었고, 고려의 독자적인 도병마사 · 식목도감의 제도를 병용하여 세력의 균형 위에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끈질기게 지방에 잔존하는 세력들을 통제하는 데 힘써 향호(鄕豪)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갔다.
그러나 무신란을 계기로 하여 무인집정기를 거치면서 왕권과 재상권의 균형이 깨지고, 재상권이 도당을 중심으로 강화되어 왕권을 제약하고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권력의 집중 및 재상권의 강화 경향과 더불어 사회구조의 변화에 바탕을 둔 재상의 관료적인 성격이 또한 강화되었다.
고려 지배세력의 교체를 요약하면, 초기의 호족세력이 문벌귀족으로 바뀌며 무인집정기에 변화하여 후기에는 권문세가로 바뀌었으며, 다시 사대부 계층으로 넘어가면서 지배층에의 참여 폭이 확대되는 과정을 밟아왔다. 중앙의 통제하에서도 꾸준히 성장한 향리를 중심으로 한 중간 계층에 바탕을 둔 사대부 세력이 증가하여 공민왕 이후 사회변동과정에서 비록 그 이면에는 군사력이 개재하였으나 도당을 통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지배세력의 교체와 더불어 왕조가 교체되었으니, 이것이 조선조의 건국과정을 뒷받침하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사회변동이었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 고려 말기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정종대에 이르러 도평의사사가 의정부로 개편되고, 중추원의 왕명출납기능이 승정원으로 분화되며 집현전이 설치되는 것을 비롯하여 태종대에는 문하부(門下府)가 의정부와 사간원(司諫院)으로 분화되고, 삼사의 기능이 호조로 이관되는 등 전면적인 개편이 단행되었다.
뒤이어 세종대의 경연청(經筵廳)의 설치, 군현제의 정비, 과거제도의 개혁, 문산계(文散階) · 무산계(武散階)의 완성 등을 통하여 중앙집권적 실적주의관료제의 정착을 보게 되며, 세조를 거쳐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중앙관제의 구조와 기능면에서 왕권과 신권(臣權) 사이에 권력의 조화가 배려된 중앙집권적 관인지배체제가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중앙관제의 대강을 크게 문관(文官:東班) · 무관(武官:西班)으로 나누고, 동서 각 반은 다시 내(內:京 또는 中央) · 외(外:地方)의 직으로 나누었으며, 모든 관리는 정1품에서 종9품에 이르는 18품계로 나뉘어졌고, 관아들은 그 장(長)의 품계에 따라 고하의 계급이 정해져 있었다. 법제상으로 최고정책에 관여하는 기관으로서 국왕 밑에 묘당(廟堂)으로서 의정부가 있고, 그 감독하에 육조가 있어 행정을 분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일반행정의 중앙관제 이외에 특수중앙관제로서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의정부와 각 조의 지휘 · 감독을 받지 않고 국왕에 직속되는 비서기관으로 승정원, 사법기관으로 대간(臺諫)인 사헌부 및 사간원, 자문기관으로 홍문관, 그리고 예문관 · 춘추관 및 의금부 등이 있으며, 또 하나는 의정부와 각 조의 지휘 · 감독을 받는 한성부(漢城府) · 개성부(開城府) · 수원부(水原府) · 강화부(江華府) 등이다.
① 의정부와 비변사:의정부는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庶政)을 공평하게 하며, 음양(陰陽)을 순조롭게 하고 국토를 정리하는 직책을 맡은 최고정책기관이었다. 한때 국왕이 정치적 실권을 행사했던 기간에는 의정부의 정치적 기능이 무력화된 적도 있었으나, 1516년(중종 11)에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가 부활되면서 최고정무기관으로서 실질적인 구실을 유지하는 듯했다. 그러나 마침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으로 변경이 긴장하자 지변사재신(知邊司宰臣)으로 하여금 임시로 변사(邊事)를 전담하게 하였으며, 1555년(명종 10)에는 이것이 비변사라는 정식관제로 설치되어 중외(中外)의 군국기무를 총령하였다.
즉, 비변사는 『경국대전』에 규정된 중앙관제가 성종대 중반 이후부터 계속되는 외적과의 잦은 변방충돌로 군정 · 군령 체제에 동요를 일으키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국기무 전부를 총괄하고 병권(兵權)과 정권(政權)을 장악하며, 변방군사는 물론 내치 · 외치 · 재정에 이르기까지 간여하지 않은 일이 없었던 최고권력기구로서 탄생되었다.
따라서 명칭은 비변사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의정부와 육조의 중요 기능을 통합한 것으로서 의정부와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비변사제도는 때로 의정부에로의 복귀가 주장되기도 하였지만 그대로 조선 말까지 존속되었으며, 의정부도 법제상 조선 말까지 엄존하였지만 그 실권은 비변사로 옮겨졌던 것이다.
② 육조:중앙관제의 육조편제는 관직을 천 · 지 · 춘 · 하 · 추 · 동의 육관으로 분류하고, 또한 정무를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의 육부로 분류하는 이른바 육분법에 준거한 것으로, 『경국대전』에 의하면 육조를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의 순서로 나누었다. 육조의 기능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이조:관리의 채용 · 임명 및 봉급과 봉군 · 봉작에 관한 일, 고과 · 인사 등을 담당하였다.
㉡ 호조:호구(戶口) · 공부(貢賦) · 전량(田糧) 및 식화(食貨) 등의 재정을 담당하였다.
㉢ 예조:예악 · 제사 · 연향(宴享) · 조빙(朝聘) · 학교 · 과거 등의 교화를 담당하였다.
㉣ 병조:무관의 선발 · 임명 · 봉급 · 군무 · 의위(儀衛) · 우역(郵驛) · 병갑(兵甲) · 기장(器仗) · 문호관약(門戶管鑰) 등의 군사를 담당하였다.
㉤ 형조:법률 · 형벌 · 사송(詞訟) · 노예 등의 사법을 담당하였다.
㉥ 공조:산택(山澤) · 공상 · 영선 · 도야(陶冶) 등의 공영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육전체제에 의한 직무 분장과 함께 그 예하에 각사(各司)와 속아문(屬衙門)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상 중앙관제로서 의정부 · 비변사, 그 밑에 육조 · 육조속아문 등이 있으나, 이들은 서로 상하의 명령계통에 의해서 엄격한 계층적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 국왕에게 집중적으로 직결되어 있어서 각 조의 속아문과 같은 하급관청은 고관의 겸직으로서 제조(提調)를 추대하였다.
이와 같은 겸직제는 인력통합과 중앙집권화를 촉구하기 위한 정치적 배려에서 고안된 것이었으나, 국왕을 중심으로 명령계통을 형식상 집권화한 나머지 통솔범위의 한계가 배려되지 않고 있다. 그 밖에도 각 기관의 소관사항이 중복되거나 무질서하게 분산되어 있고, 특히 사법권 · 경찰권 등 중요한 행정권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다.
조선시대 중앙정무기관에는 국왕을 보필하는 최고정무기관과는 별도로, 국왕에 각기 직속하고 있는 특수중앙기관으로서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 언관으로서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 그리고 우수한 문사들의 관서로서 홍문관 외의 예문관 · 춘추관 · 성균관 · 경연, 또한 국가의 사법기관으로서 사헌부 외의 의금부 · 형조 · 한성부 · 장례원 · 관찰사 · 수령 등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중앙관제는 성종대 중반 이후부터 계속된 변방에서의 외적과의 잦은 충돌로 군정과 군령체제에 동요를 일으키게 되자, 그에 대처하기 위해서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이 대두되고 또한 비변사가 설치되어 의정부의 기능을 실질상으로 대행하게 되었음은 앞에서 간단히 지적한 바와 같다.
즉, 비변사는 성종대와 중종대에 국가가 비상적 상황에 놓이게 되자, 처음에는 관제 외의 새로운 비상권력기구로서 임시로 설치, 운영되었으며, 명종 초년에 이르기까지 끝내 정식 관제화되지 않은 채 그 존폐와 기능상의 신축이 거듭되면서 계속 운용되어 왔으나, 마침 1554년(명종 9) 후반부터 잦아진 변경의 일이 이듬해의 을묘왜변으로 이어지는 동안에 비변사는 그 활동이 잦아지고 권한도 커질 수 있게 되고 청사도 따로 마련하여 관제상의 독립된 하나의 정식 아문이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변경의 수비와 변무처리 기관으로서 그 권한도 의정부에 비할 정도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부터 비변사는 국가의 최고정책결정기관 및 집행기관으로서 변경사만이 아니라 정치 · 경제 · 외교 · 군사 · 문화 등 군국기무 전반에까지 관여하게 되었으며, 더구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 기능이 더욱 확대됨에 따라 의정부의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다.
비변사의 기능과 편제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변천해 왔으며, 대체로 의정부와 육조의 중요부분을 통합하고 뒤에 그 구성범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임진왜란중에 비변사가 담당, 처리하였던 기능은 논공행상 · 군율시행 · 의병격려 · 정절포장 · 군량운반 · 둔전계획 · 도감설치 · 수령임명 · 청병호군(請兵犒軍) · 주청참수(奏請斬首) · 과거 · 납속사목(納粟事目) · 공물진상 · 의장복색 · 산천제사 · 사시매장(死屍埋葬) 등 군정 · 민정 · 외교 · 재정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필요한 모든 군국기무와 일반 서정을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이와 같은 비변사 직제는 1594년 임진왜란중에 훈련도감이 창설되자 훈련대장도 제조를 겸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비변사는 확대, 강화되어 ‘비국(備局)’ 또는 ‘주사(籌司)’라고 하였으며, 이 비국은 사실상 의정부와 육조를 흡수하여 한 나라의 병권과 정권을 통합한 초정부적인 기구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비변사의 변천은 인조대에 들어와서 인조반정과 동시에 군사정부의 대권을 장악하게 된 서인의 반정공신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비변사의 요직을 겸임하면서 실질적으로 조정의 정령을 재단하는 최고정책결정기관으로서 비변사를 운영하여 정치권력과 밀착, 의정부는 허명만을 가지고 육조는 점차 그 실권을 잃게 되었다.
즉, 인조대에 뒤이어 효종대 · 숙종대에 비변사가 점차로 문무의 중추인 의정(議政) · 대장(大將) · 각조판서(各曹判書) 및 유력한 당상관을 망라해서 겸직하게 함으로써, 군무와 정무에 관한 정책결정기능뿐만 아니라 이를 집행하는 기능까지도 맡아보게 된 것이다. 그 뒤 영조대 · 정조대에 비변사 기구의 확장을 보게 되고, 왕조 말기까지 계속하여 국방과 군사를 포함한 국정 전반에 걸친 중대 사건을 모두 토의, 결정하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은 조대비(趙大妃)의 교령으로 의정부와 비변사 간에 권한을 분장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비변사를 의정부에 통합하여 일부(一府)로 만들어, 비변사를 사실상 폐지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확대, 강화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고종 17) 12월에 구 관제를 그대로 둔 채 새로이 설치한 중앙정부관제로서, 이는 조선조가 개항 이후 시도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성격의 정부기구 개혁이었다. 조선시대 몇 차례의 대일본시찰단과 대청국 영선사의 파견, 특히 우리 나라를 둘러싼 국제관계에 대한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보고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의 소개, 그리고 일본사신의 내왕과 청나라 이홍장(李鴻章) 등의 권고가 있어 개항 이후의 여러 외국과의 외교 및 통상 등의 업무를 관장하게 하기 위하여 중앙관제에 한 아문을 설치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구의 설치는 우리 나라가 최초로 세계 열강과 접촉, 교섭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그리고 뒤이어 갑오경장 때에 전반적인 관제개혁이 있을 때까지 그 동안의 제반 개혁의 시발점으로서의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통리기무아문의 편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세력 다툼을 배경으로 빈번하게 개폐되어 왔으나, 대체로 다음의 세 단계로 나뉜다.
① 1880년 12월에 최초로 설립된 통리기무아문은 사대 · 교린 · 군무 · 변정(邊政) · 통상 · 군물 · 기계 · 기선(機船) · 어학 · 전선(典選) · 이용(理用) · 군함 등 12개의 사(司)로 편성하여 통상 · 군무 · 기술도입 등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한편, 내외의 군국기무를 총괄하였다.
이어 1881년 11월에 동문(同文) · 군무 · 통상 · 이용 · 전선 · 율례(律例) · 감공(監工) 등 7개의 사로 압축하는 동시에 각 사의 담당기능과 관계도 조정하였다.
② 1882년 수구파의 총궐기인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개혁주도세력인 개화파[閔氏一派]들이 밀려나자 통리기무아문은 일시 폐지되고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삼군부(三軍府)가 부활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도움으로 민비가 재집권하자 통리기무아문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약칭 外衙門)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약칭 內衙門)으로 나뉘어 부활되었다.
전자는 정각(征搉) · 장교(掌交) · 부교(富敎) · 우정(郵政)의 4개 사로 편성되어 독판(督辦) · 협판(協辦) · 참의(參議) · 주사(主事) 등을 두었다. 후자는 삼군부 · 비변사의 후신으로서 군국기무는 물론 내정 전부를 관장했으며, 이용 · 군무 · 감공 · 전선 · 농상(農桑) · 장내(掌內) · 농상(農商) 등의 7개 사를 분치하고 총리 · 독판 · 협판 · 참의 · 주사 등을 두었다.
이와 같은 1882년의 개혁으로 조선조의 관제는 갑오경장 때까지 10여 년간 내외의 두 아문으로 대체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내외의 두 아문을 비롯한 새로운 관제는 기존의 관제를 정비, 간소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벌여놓았기 때문에 업무의 분화 및 명령 계통의 면에서 많은 문제점과 혼란을 야기시켰다.
③ 1880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통리기무아문은 초기에는 그 업무가 새롭고도 기존 업무에 대하여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단 기존 관제(의정부와 육조)와 별도로 그 외곽에 설립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 업무가 기존 관제의 그것과 중복되는 점이 많으며, 옥상옥의 폐단이 많은 점에 비추어 언젠가는 통합, 정비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기존 관제 자체가 업무가 명백히 분화되지 않고 명령계통이 확연하지 않은 등 전근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현상태로는 통합 · 정비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갑오경장 이전에도 몇 차례 통합의 시도가 있었지만(1884년의 경우), 곧 원상복귀하고 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근본적이며 전반적인 통합 · 정비는 1894년의 근대적 행정개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갑오경장은 청일전쟁 발단 전부터 일본에 의해 계속적으로 주장되다, 개전과 동시에 강제에 의하여 청일강화조약 후 수개월까지 실현된 정치 · 행정 · 경제 ·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었다. 이 개혁은 조선의 낡은 체제를 타파하여 조선을 근대국가체제로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정부가 추진 주체로서 수행한 내정개혁이며, 따라서 일본의 침략과 결부된 밖으로부터의 타율적인 근대화 개혁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한편, 우리 민족의 내정개혁을 위한 내재적인 요구와 자주적인 근대화 세력이 점차 성숙되어 가고 있던 시점이었지만, 당시 일본측의 군사적인 위압과 그 조종 아래 소수의 친일정치인들의 책동으로 자주적인 근대화 노력에는 많은 제약이 뒤따랐던 것이다. 이 개혁은 1년 만에 내외의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자 중단되었고, 그 뒤의 조선 내부의 정쟁 격화와 삼국 간섭에 따르는 러시아세력의 한반도에의 정치적 진출, 그리고 일본세력의 후퇴 등 내외 사정의 변천과 더불어 정체되어, 1년 남짓 되어(1894.7.24.∼1895.6.23.)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이 내정개혁이 우리의 후대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커서 조선의 정치 ·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동요시켰다. 즉, 이때 실제로 개편된 근대적 관제는 대체로 유지되어, 그것은 그 뒤 10년을 넘지 않아 일어난 1905년 러일전쟁의 일본측의 승리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완전지배권이 확립되는 보호정치와 나아가서는 1910년의 ‘ 한일합병’의 강요로 40년 가까이 식민통치의 소지로서 굳어져 갔다.
갑오경장의 경과를 살펴보면, 일본측은 1894년 6월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를 통하여 내정개혁방안강목과 그 실시방안을 제시하면서 기한부로 수락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때에 조선 정부는 그 해 6월 11일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여 누적된 폐정을 자주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대의 위협과 쿠데타적 무력인 내정간섭으로 친일계의 흥선대원군 정부가 등장하면서 자주적 개혁의 노력도 좌절되었으며, 뒤이어 일본은 그 해 6월 25일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게 하여 개혁을 강행하였다.
군국기무처는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실질적인 정치적 권한을 빼앗은 초정부적 독재기관으로서, 영의정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겸직하게 하고 친일인사들로 구성되어, 군국의 기무와 모든 개혁을 최종적으로 심의, 결정하며 갑오경장을 추진한 중추기관이었다. 1894년 6월 28일 군국기무처에 상정되어 즉결로 가결된 이른바 제1차개혁은 근대법치국가의 내각제도를 모방한 새 관제로서 의정부관제와 궁내부관제를 구별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의정부 및 내무 · 외무 · 탁지 · 군무 · 법무 · 학무 · 공무 · 농상의 8개 아문으로 구성되고, 군국기무처 · 도찰원(都察院) · 중추원 · 의금사(義禁司) · 회계검사원 · 경무청 등이 부속되어 있으며, 의정부의 장관으로서 총리대신을 두어 내각 수반으로서 각 아문을 통할하게 하였다.
각 아문은 구 육조를 기초로 하여 확충한 것이다. 외무아문은 1881년에 창설된 통리기무아문의 후신이고, 농상아문은 일본관제를 모방하여 신설한 것이며, 내무는 이조, 탁지는 호조, 군무는 병조, 법무는 형조, 학무는 예조, 공무는 공조를 각기 계승한 것이다. 특히, 오영(五營)이 모두 폐지되고, 그 소속 장졸과 군관(軍官)영리(營吏) 등은 군무아문에 통합되었다.
그리고 의정부 및 각 아문에 부속된 처(處) · 원(院) · 국(局) · 소(所) · 청(廳) · 사(司) 등의 편제는 구 관제의 각 조 속아문 및 각 독립관청이었던 원 · 사 등을 정리 · 폐합하지 않고 이에 분속시키고, 또 시대적으로 필요한 약간의 처 · 국 · 청 등을 증설, 분속시키고 있어 중복되거나 유명무실한 기구가 적지 않았다. 각 아문마다 총무국 · 회계국 및 기록국 등의 보조기관을 병설하는 등 편제상 불합리하고 비경제적인 것이 많았다.
한편, 위의 각 부아(府衙)의 통용규칙을 통하여 개혁된 행정체제는 국왕-의정부회의(내각)-총리대신-각 아문의 대신(구제의 판서)-각 아문의 협판(구제의 참판으로 차관에 해당하며, 총무국장을 겸함)-각 아문의 참의(국장에 해당)-각 아문의 주사(부국장 또는 과장) 등의 계층제로서 그 상하의 명령계통이 비교적 명확하게 제도화되어 있고, 행정권은 현저히 분권화되어 있으며, 각 대신은 총리대신 주재하에 연대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품계는 칙임관 · 주임관 및 판임관(判任官) 등의 계급제를 채택하고 있다.
궁내부관제는 처음 의정부관제안과 함께 군국기무처에 상정되었으며(6월 28일), 특히 왕실의 영향을 고려하여 그 심의를 피하고 국왕이 자진하여 부의하는 형식을 밟아 뒤늦게 7월 22일에 품재를 거쳐 공포되었다. 이 때문에 부중(府中)의 관제에 비하여 훨씬 구태의연하며 복잡하고, 불필요한 벼슬아치와 특정인을 위해 설치된 자리가 많았다.
특히, 궁내부의 부속 부원으로서 새로 이관, 편입된 승선원 · 경연청 · 시강원 · 규장각 · 승문원 등은 큰 정치적 실권을 보유하고 있는 관청으로서, 이 기관들이 궁내부에 소속된 것은 편제상 당연하다 하더라도 이들 기관을 겸임하는 유력한 원임대신 등 정치가가 국왕에게 친근하여 그의 중요 정책결정 자문에 응하고 있었으며, 의정부도 이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통례로 되어 왔다.
제1차 내정개혁이 난항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흥선대원군 정권의 종말과 더불어 그 개혁안이 사실상 철폐되기에 이르자, 신임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 馨)는 10월 23일에 미리 준비된 새로운 내정개혁강령을 어전회의에 제출하였다. 제2차 관제개혁안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개혁강령은 제1차 개혁안을 기본으로 하여 20개 조로 되어 있다. 그 특색은 국왕이 정권을 통일하여 친정을 베풀되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서 전제정치를 지양하고 국왕으로서 법령을 준수할 의무를 선언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왕실사무와 국정의 분리, 정부기관의 권한분장, 권력쟁탈과 정치보복의 일소, 일원적인 군제와 경찰제의 확립, 예산제도의 근대화, 인사제도의 근대화 등을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1894년 12월 12일 국왕이 종묘 사직에 서고하여 선포한 「 홍범14조(洪範十四條)」는 바로 이 내정개혁강령20조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제2차 개혁에 따른 신관제에 의하면, 의정부를 내각으로, 또 각 아문을 부(部)로 각기 개칭하는 동시에 공무아문을 농상아문으로 통합하고, 구 관제의 외무 · 내무 · 탁지 · 군무 · 법무 · 학무 · 농상 · 공무의 8개 아문을 외부 · 내부 · 탁지부 · 군부 · 법부 · 학부 · 농상공부의 7개 부로 개정하였다.
여기서 내각은 국무대신으로 구성되어 국무대신은 국왕을 보필하여 소관사무에 관하여 정치적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은 각 대신의 수반으로서 왕지를 받들어 행정 각부를 조정, 통합하는 제한군주적 내각책임제를 규정하고 있다. 내각관제는 종래의 의정부기구를 대폭 폐합, 축소하여 재편하고 있으며, 총리대신의 사무기구인 내각총서(內閣總書) 밑에 총리대신관방(總理大臣官房)과 참서관실(參書官室) 및 기록국으로 축소, 조정하고, 각 부도 대신 · 협판 밑에 국 · 과를 대폭 폐합, 간소화하고 있다. 가령, 과거의 총무국은 대신관방으로 개편하고, 불필요한 국을 과로 격하시키는 동시에 대신과 협판(차관) 아래 국장 · 참사관 · 비서관 · 주사 및 고원 등을 배치하여 명령계통을 체계화시켰다.
이와 같은 제2차 내정개혁은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강행, 추진해 왔으나, 마침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전이 삼국간섭을 유발하고 또 조선 정계는 신구파의 갈등으로 정가의 정치파동이 착잡해지자, 일본측은 부득이 개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을미사변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어 항일의병운동이 격화되면서, 그 뒤 자주적 내정개혁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아관파천 후 성립된 신내각은 전 친일내각이 추진해 온 여러 개혁을 중지 또는 무시하고, 갑오경장 이전으로 후퇴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국왕은 먼저 지방관제의 개정에 착수하여 이미 갑오경장에서 종래의 전국 8도제(八道制)를 23부제로 개편했던 것을 다시 개정하여, 1896년 8월 수도 한성부를 제외한 전국의 행정구역을 13도 7부 1목 331군으로 구분하였으며, 이 13도제 행정구역은 1945년 광복까지 계속되었다.
뒤이어 그 해 9월 24일에는 정부관제를 개정하여 내각을 다시 의정부라 칭하고, 총리대신을 의정(議政)으로 개칭하여, 의정 밑에 참정(參政) · 찬정(贊政) · 참찬(參贊) 등을 두고, 각 부 대신을 찬정이라 칭하는 등 왜색을 일소하기에 주력하였다. 또한, 의정부의 회의규정도 개정하여 국왕이 친림하여 만기를 총관하게 함으로써, 갑오경장 이전의 전제적 통치체제로의 복구를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광무 1) 10월에는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여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개정하였으며, 그 뒤의 단편적 관제개혁으로 1898년 7월에 양지아문(量地衙門) 설치, 농상공부에 철도사(鐵道司) 설치, 1899년 4월에 의무관제 공포와 광제원(廣濟院) 설치, 6월에 원수부(元帥府)의 궁내 설치 및 법규교정소 설치, 7월에 표훈원(表勳院) 설치, 8월에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반포, 1900년 3월에 통신원(通信院)관제(官制) 공포 및 4월에 철도원(鐵道院) 설치 등이 있었다.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한국을 이른바 보호국으로서 정치 · 경제 · 내정까지 지배하고자 한국 통감부 체제를 구축하였다.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理事廳官制)에 의하면 한국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통감부에 통감(統監, 親任官)을 두며, 통감은 일본왕에 직속하여 한국에 있어 일본 정부를 대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 · 행정 · 군사 등 시정 일반에 관한 권한을 가졌다. 또, 한국 내에 필요한 곳에 이사청을 두었는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및 감독을 받아 종래 영사(領事)에 속하였던 사무와 조약 및 법령에 의거하여 제반 사무를 관장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 지방군대와 관헌에게 긴급지시를 내릴 수 있다.
조선통감부의 관제 편제는 통감 밑에 총무부(비서과 · 서무과 · 외무과 · 내무과 · 법제과 · 회계과 · 토목 및 철도과) · 농상공부(상공과 · 농무과 · 광무과 · 수산과 · 산림과) 및 경무부(고등경찰과 · 경무과 · 보안과 · 위생과) 등 3부가 있고, 이 밖에 한국주찰일군사령관과 한국시정 개선에 관한 협의회가 통감지휘 · 감독하에 속하여 있었다. 그리고 1907년 3월에는 외무부가 추가되었다.
특히 억압적인 치안체제 확립을 위하여 처음에는 경무고문제도(警務顧問制度)를 두어 한국경찰을 사실상 지휘, 감독하다가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1907년 10월에는 통감 휘하의 군사령관으로 하여금 군사 · 경찰을 장악하게 하여 한국의 치안유지를 담당하게 하였다. 여기서 군사경찰인 헌병과 일반경찰이 완전히 통합된 헌병경찰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체제는 1919년 3 · 1운동의 영향을 받은 총독 사이토(齋藤 實)의 기구개편으로 보통경찰제도로 변혁되기까지 강점 후에도 지속되었다.
한편, 통감부시대의 대한제국 중앙통치조직은 국왕 밑에 통감부계 조직이 있으나 통감은 실질상 국왕보다도 일본왕의 직속 하에 있는 독재관과 같은 존재였다. 이 통감부조직을 제외한다면 국왕 밑에 중추원 · 궁내부 · 내각(총리대신관방 · 법제국 · 외사국 · 표훈국 · 법전조사국) 및 통감 지휘하의 내각회의가 있고, 내각 밑에 행정부서로서 내부(지방국 · 경무국 · 토목국 · 위생국 및 경시청과 지방행정관서감독) · 탁지부(사세국 · 사계국 · 이재국 · 임시재원조사국) · 학부(학무국 · 편집국) · 농상공부(농무국 · 상공국 · 산림국 · 광무국 · 수산국) 등이 있었다.
대한제국 중앙통치조직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① 내각체제로 정비되었다는 점이다. 즉,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 체결 후 「의정부관제」의 개혁(1904.3.4.)으로 의정부는 존속시키되 군주의 권한을 크게 축소시켜 내각의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1907년에 의정부는 다시 내각으로 개칭되어 내각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리하여 내각은 국무대신(내각총리대신 및 행정각부대신)으로 조직되고 법률 · 칙령은 내각총리대신 및 관계대신의 부서(副署)를 필요로 하고, 중요 정책사항은 내각회의를 경유하여야 하였다.
② 입법 · 행정 · 사법 3권의 권한 분립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즉, 국왕의 권한이 제한되면서 내각이 정책형성을 주도함에 따라 개념상이나마 정책형성기능과 집행기능이 구별되기 시작하였고, 또 재판소가 구성되어 사법권이 어느 정도 독립됨으로써 국권의 분화과정이 촉진된 것도 주목된다.
③ 통치조직의 기능적인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④ 행정에 관한 법치질서가 유지되고 관의 자의적인 재량권 행사가 크게 봉쇄되었다.
⑤ 지방행정관서가 일반지방행정관서와 특별지방행정관서로 분화되어, 전자는 내무대신의 일반적 지휘 · 감독을 받고, 후자는 관계주무대신의 지휘 · 감독을 받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것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완전히 일본정부에 인수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한일합방조약(1910년 8월 23일 조인, 29일 공포)을 근거로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관제」는 1910년 9월 30일에 공포되어, 그 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라는 통치구조가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1919년 3 · 1운동까지의 시기를 이른바 무단통치기, 3 · 1운동 이후 만주사변까지의 시기를 회유조정기, 만주사변 이후 패전까지의 시기를 전시동원기로 규정하여 각 시기별 관제의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총독은 한국에 있어 최고통치기관으로서 그 보좌관으로 정무총감을 두며, 그 밑에 중앙행정기구로서 총독관방(비서과 · 무관실참사관) · 총무부(외사국 · 인사국 · 회계국 · 문서과) · 내무부(서무과 · 지방국 · 학무국) · 탁지부(서무과 · 세관공사과 · 사세국 · 사계국) · 농상공부(서무과 · 식산국 · 상공국) 및 사법부(국 없음)가 있다.
지방행정기관으로서 13도 12부 317군과 4,338면, 사법기관으로서 재판소(법원 · 검사국)와 감옥, 치안기관으로서 경무총감부, 자문조사기관으로서 중추원과 취조국, 교육기관으로서 19개 각 학교, 그리고 경제약탈기관으로서 철도국 · 통신국 · 임시토지조사국 · 세관 및 전매국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① 독립된 입법기관이 없고, 유일한 입법기관은 바로 조선총독 자신이었다. 일본의 본국법이 부분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있었으나, 원칙적으로 모든 통치는 ‘조선총독의 제령(制令)’을 그 근거로 하였다. 그 입법과정은 한민족의 정치적 의사 투입과정이 폐쇄된 전제적 군국통치과정으로서, 헌병경찰 폭력기구를 배경으로 하는 사상 유례가 없는 식민통치체제였다. 한편, 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이 있었으나, 그 구성원은 식민통치에 기여한 친일파 한국인을 예우하기 위하여 관선된 자들로 구성되어, 민족분열정책에 편승하는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하였다.
② 헌병경찰체제를 강화하였다. 즉, 1910년 9월 10일 ‘조선헌병대조례’에 의해 조선총독 휘하의 경무총장은 조선주둔 헌병사령관인 육군장관(陸軍將官)으로 겸직하게 하고, 경찰업무를 통리, 감독하게 하였다.
③ 사법기관인 재판소도 총독의 권한에 예속되는 행정관서에 불과했고, 검사국(檢事局)도 재판소 내에 부설되어 자율성이 용납되지 않았다.
④ 조선총독의 지위는 일본왕에 직속하여 한국에서 정무를 통할하고 군대를 통솔하며, 입법권과 사법권을 독점하는 독재적 종합행정권을 자행하는 식민지 관리자가 되었다.
3 · 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종래의 ‘무단정치’로부터 허위적인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회유와 착취를 보다 강화시켜 갔다. 1919년 8월에 단행된 관제개혁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총독에 대한 병권(兵權)의 위임을 해제하고, 종래 군인에 한정되었던 총독의 지위에 문관이 충용될 수 있게 개방하였다.
②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도를 실시하는 동시에 일반 관리 및 교원 등의 금선제복(金線制服)과 제모(制帽) 및 대검(帶劍) 등을 폐지하였다.
③ 총독부의 중앙행정조직을 내무 · 재무 · 식산 · 법무의 4국으로 개정하고, 여기에 종래 내무부에 부속되어 있던 학무국을 총독 직속으로 승격시켰다. 또 종래 독립의 경찰총감부를 경무국으로 개편하여 국으로 개정하고, 총독관방의 총무 · 토목 및 철도 3국을 각기 서무 · 토목 및 철도의 3부로 개정하여 결국 본부(本府)는 6국 4부로 편성하고, 각 국과의 분장업무를 과도한 집중화를 피하는 방향으로 조정 및 재편성하였다.
④ 지방관제 중 도장관을 도지사로 개정하고, 각 도 경무부를 폐지하여 그 대신 지사에게 경찰권을 부여하였다. 이와 같은 관제개정은 총독의 지배장치를 정비, 강화하고, 치안유지에 최대 중점을 둔 것이었다.
만주사변(1931.9.)을 계기로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 개시는 한국에 병참기지로서의 구실을 강요하였으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도발에 이르는 전시동원기간에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단편적 관제개정이 있었다.
우선, 1931년 6월에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총독부서 관제를 총독관방 및 내무국 · 재무국 · 경무국 · 학무국 · 식산국 · 법무국 · 토지개량부 · 산림부의 6국 2부와 외국(外局)인 철도 · 체신 · 전매국을 편성하였으며, 특히 농촌을 대상으로 하는 업무를 일괄 관장하는 농림국을 신설하였다.
이 밖에 농촌진흥운동의 최고지도기관으로 총독부 농촌진흥위원회를 신설하여,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각 국장 및 관계 과장을 위원으로 하는 중앙기관과 그 밑에 각 도 · 군 · 읍 · 면 농촌진흥위원회를 두어, 농가경제갱생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뒤이어 1938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하는 조선연맹을 설치하고, 이 운동전개를 위한 행정기구편성 관제개정이 있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3 · 1운동을 계기로 하여, 국내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즉, 국내에서는 ‘ 조선민국임시정부’와 ‘ 신한민국정부’가,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리고 러시아 영토에서는 ‘국민의회’가 조직되었다. 이상 세 개의 정부는 거의 동시에 조직되었으나 통합정부 수립을 위한 꾸준한 노력으로, 1919년 9월 6일 3정부통합에 합의를 보았다.
통합된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에 규정된 관제에 의하면, 근대적 자유민주주의공화국 정치체제하의 행정부 사무는 내무 · 외무 · 군무 · 법무 · 학무 · 재무 · 교통의 6부와 노동국을 두고, 각기 분장하였다. 그리고 국무원(國務院)은 국무원(國務員)을 조직하여 행정사무를 모두 처리하며, 국무총리와 각 부 총장과 노동국총판은 국무원으로서 대통령을 보좌하고 소관사무에 대하여 부서(副署)하게 되어 있었다.
1944년 4월에는 임시정부의 관제개정이 이루어졌는데, 종래의 국무위원회 주석 밑에 다시 주석을 보좌하며 국무회의에 열석하고 주석이 유고할 때에는 그 직권을 대행하는 부주석이 있게 되고, 종전 6인 이상 10인 이내의 국무위원이 8인 이상 14인 이내로 증원되었다. 또, 종전의 행정부서인 내무 · 외무 · 군무 · 법무 · 재무의 5부 외에 문화 · 선전의 2개 부를 신설하였고, 각 부의 장은 국무위원 외에도 선임할 수 있게 하였다.
정부 내에는 14인 이내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되는 국무위원회와 7부의 책임자로 구성되는 행정연석회의가 함께 행정업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이 밖에 군사통수부(軍事統帥府)가 있어 주석 밑에 참모총장 · 군무부장 및 국무위원 1인(막료의 주간)으로 구성되어 군사최고통수권을 행사하였다. 그 밖에 국방 및 용병에 관한 계획을 정하는 참모부, 그리고 국가의 모든 회계를 검사하는 회계검사원 등이 있어 정부는 크게 확충, 강화되었다.
1945년 8 · 15광복과 함께 38선을 중심으로 그 이남과 이북에 미국군과 소련군이 각기 진주함으로써 점령군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20일에 미군정청이 조직되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에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38선 이남지역의 과도기적 통치를 위한 임시정부의 성격을 띠었다.
미군정청의 조직은 군정장관과 민정장관 · 서기관 외에 관방총무과(官房總務課) · 외사과(外事課) · 지방과 · 경무국 · 재무국 · 광공국 · 농상국 · 학무국 · 법무국 · 체신국 · 교통국의 3과 8국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든 장(長)이 미군장교로 임명되었다. 1946년에는 13부 6처로 기구가 개편되면서 군정장관을 제외한 모든 장이 한국인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1947년 6월에는 미군정청 한국인기관을 남조선과도정부라고 하고, 기구도 13부 2처 1특별국으로 개혁하면서 인사위원회와 경제위원회를 두었다.
또한, 미군정청은 삼권분립이라는 대전제하에 부서상으로는 행정조직에 편제되어 있는 사법부에 검찰권과 재판권을 소속시켜 사법권의 독립을 꾀하였으며, 정치적 반대가 특히 심한 중에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을 구성하여 군정장관의 거부권하에서 과도입법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경찰의 사법권을 폐지하고,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여 치안유지에만 봉사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남한만의 총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회가 헌법을 제정하고, 이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미군정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정헌법은 미군정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삼권분립을 대전제로 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였는데, 대통령 소속하에 고시위원회와 감찰위원회를 두어 중국의 오권헌법적(五權憲法的)인 색채를 띠었다.
정부조직은 내무부 · 외무부 · 국방부 · 재무부 · 법무부 · 문교부 · 농림부 · 상공부 · 사회부 · 교통부 · 체신부의 11부로 구성되었는데, 1949년 보건부가 사회부에서 독립함으로써 12부가 되었다. 1955년에는 보건부와 사회부를 보건사회부로 통합하고, 부흥부를 신설하였다. 국회는 단원제로 구성하여 18개 상임위원회를 두었으며, 사법부의 법원은 대법원 · 고등법원 · 지방법원으로 구성하였다.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 · 19혁명과 함께, 제3차 개헌으로 출범한 제2공화국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구성되는 국무원을 내각 수반이 통솔하는 내각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를 채택하였다. 정부조직은 1원(경제기획원) 2처(내각사무처와 법제처) 12부(부흥부가 폐지되고 공보부가 신설)로 구성되었다.
1962년 6월에 건설부가 신설됨으로써 13부가 되었다. 아울러 재무부 산하에 전매청과 농림부 산하에 농촌진흥청을 각기 두었다. 또한, 중앙선거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설치하고 감찰위원회와 경찰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공안위원회도 두었다. 그러나 제2공화국의 새로운 조직은 가동되기도 전에 5 · 16군사정변으로 그 기능이 정지되고 말았다.
5 · 16군사정변에 의해 「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공포되고, 제5차 개헌을 거쳐 제3공화국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다시 대통령중심제가 채택되었으며, 국무회의는 대통령에게 통솔되는 단순한 심의기관이 되었다. 아울러 경제기획원장관이 겸임하는 부총리제가 도입되었고, 국무총리 산하에 비서실과 기획조정실이 설치되었으며,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중앙정보부가 신설되었다.
또한, 대통령 자문기관으로 경제과학심의회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도 설치되었다. 정부조직은 2원(국토통일원 신설) 4처(총무처 · 과학기술처 · 법제처 · 원호처) 13부(공보부를 문화공보부로 개칭)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재무부 산하에 조달청이, 법무부 산하에 검찰청이, 농림부 산하에 산림청과 수산청이, 보건사회부 산하에 노동청이, 교통부 산하에 철도청이 각각 신설되었으며, 과학기술처 산하에는 원자력청이 설치되었다.
비상 계엄령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국무회의에서 제7차 개헌에 의해 탄생된 이른바 유신헌법은 제4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유신헌법은 영도적 대통령중심제라는 신대통령제를 채택하고, 대통령의 간접선거권 및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의 선출권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 제안하는 헌법개정안의 최종의결권을 가지는 헌법상 최고수임기관이라는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를 대통령의 통솔하에 두어,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을 극도로 위축시켰다.
유신헌법에서도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하였는데, 국무총리 산하에 행정조정실과 행정개혁위원회를 신설하고 무임소장관을 새로 두어 국무위원에 포함시켰다. 정부조직은 제3공화국과 거의 같았는데, 농림부가 농수산부로 개칭되었으며(농림부 소관이던 산림청은 내무부 산하로 이관), 1977년에는 동력자원부가 신설되어 14부가 되었다. 재무부 소관이던 조달청이 경제기획원 산하로 이관되고, 과학기술처 산하의 원자력청이 폐지되었다. 또한, 재무부 산하에 국세청과 관세청을, 국방부 산하에 병무청을, 교통부 산하에 해운항만청을, 상공부 산하에 공업진흥청과 특허청을, 1979년에는 보건사회부 산하에 환경청을 각각 신설하였다.
18년간의 공화당정권은 경제성장과 적극외교 등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10월유신과 독재적인 장기집권의 폐해로 말미암아 부마민중항쟁과 10 · 26사태로 종언을 고하고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제5공화국의 정부형태는 제4공화국의 정부형태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제4공화국 당시의 통일주체국민회의나 대통령의 의회관여권 · 법원관여권 등을 없애고 민주화 · 권력분립화의 길을 밟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에는 그 행사방법에 일정한 견제를 둔 이외에는 이 또한 제4공화국의 신대통령제와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선출되는 제5공화국의 대통령은 국가긴급권뿐만 아니라 국회해산권 · 국민투표부의권 · 임시국회소집권 등을 가졌다. 단원제로 되어 있는 국회도 다소 복권이 되어, 국회의원선거는 직선제로 되고 국정조사권 등도 되찾았으나 국회의 회기를 제한하는 헌법규정 등은 그대로 존재하였으며, 새로이 국회의원의 청렴의무도 헌법상 규정되었다.
한편, 제5공화국헌법은 대통령의 법관임명보직권을 없앰으로써 대법원을 최고사법행정기관으로 부활시켰으며, 대법원에 행정 · 조세 · 노동 · 군사 등을 전담하는 부를 둘 수 있게 하고, 대법원에 대법원판사가 아닌 법관을 둘 수 있게 하는 등 상당한 변경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위헌법률심사권과 탄핵결정권, 위헌정당해산권은 헌법위원회에 주어 제4공화국의 헌법위원회를 그대로 승계하였다. 제5공화국의 정부에는 16개의 행정 각부가 있는데, 특히 이들 중에서도 제5공화국에 들어와서 신설된 것으로는 체육부와 노동부가 있다.
6 · 29선언으로 시작된 개헌논의는 정부형태를 대통령간선제에서 대통령직선제로 바꾸고 그 해 대통령선거를 통해 제6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제6공화국은 우리 헌정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로 구성되어 여당이 야당과의 상호협조를 통해 국정 현안이 다루어졌으며, 국정감사가 부활되고 청문회가 도입되는 등 국회의 위상이 제고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정책의 표방하에 작지만 강력한 정부를 내세우면서 1994년 12월 3일 ‘규제에서 서비스로’를 내건 정부조직개편 조치를 단행하였다. 2개 부처 통폐합 등 2원 13부 5처 15청 2외국체제로 개편한 결과 90여개 과가 폐지되었다. 특히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통합된 것은 주목할 만하며, 상공자원부를 통상산업부로 바꾸면서 통상업무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정보통신부를 신설하여 정보통신산업을 적극 육성하고자 하였고, 재정경제원을 만들어 예산권과 금융정책권을 조정하였다. 그리고 대기업정책은 총리실로 이관되는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맡았다. 정부조직개편은 정부산하단체, 투자기관 개편으로 이어져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로 들어간 한국정부는 당면한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1999년 5월 17일 정부조직개편을 단행하였다. 중앙부처 120개 실-국-과와 4급(서기관) 이상 공무원 241명을 감축하는 정부조직 및 직제 개편안을 단행하였다. 중앙부처의 경우 실 5개, 국-심의관 32개, 과 83개 등 모두 120개 실-국-과가 줄어들게 되었다.
신설 부처의 경우 기획예산처는 장-차관 밑에 3실 2국 체제로, 국정홍보처는 처장(차관급) 아래 3국 체제로 각각 운영되었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1급 청장 2국, 중앙인사위원회는 장관급 위원장 아래 4과로 구성되었다. 외교통상부 등 13개 부처 공보담당관이 모두 폐지되고, 현재 15개 부처 비상계획담당관 가운데 통일부 등 5개 부처는 국장급에서 과장급으로 직급을 하향조정했다.
부처별로는 외교통상부는 통상지원국 등 1국 5관 5과와 재외공관 5개 소가 폐지되고, 국방부는 획득정책국과 군수조달국 등 3국 8과가 없어졌다. 통일부는 정보분석실 등 1실 2관 4과, 국세청은 국세조세국이 각각 페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