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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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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개념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불교수행법.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불교수행법.
개설

범어로는 디야나(dhya-na), 팔리어로는 쟈나(jha-na)이다. 이를 음사하여 선나(禪那)·사유수(思惟修)라 하며, 음사와 의역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선은 인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하기 이전인 기원전 13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와 중국의 선

인도의 전통적인 선은 요가이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한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고대의 요가는 정신과 육체를 이원론적인 입장에 두고 육체적 고행에 의해 정신적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 위주의 수행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수행이 차츰 사상적으로 체계화되어 우주의 원리인 브라흐만과 개인 속에 있는 진리인 아트만의 일치를 꿰뚫어보는 수행으로 정착되어 갔다.

이와 같은 요가선과 함께 불교에서는 불교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출가한 석가모니는 처음에 두 선인(仙人)에게서 그 당시 최고의 선정을 배웠으나, 이는 육체의 고통을 주고 사후의 해탈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은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체험하였으며, 그 뒤부터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그러한 상황을 말하여 준다.

즉,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중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德目)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三學)·사념처(四念處)·사무량심(四無量心)·사제(四諦)·팔정도(八正道) 속에는 반드시 선정의 수행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선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원시불교는 사선(四禪)과 팔등지(八等至),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들고 있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 해설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공등지(空等至)·무상등지(無相等至)·무원등지(無願等至)로 나누어지는 삼등지(三等至)와 부정관(不淨觀)·자비관·인연관·계분별관(界分別觀)·수식관(數息觀) 등으로 나누어지는 오정심관(五停心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관법의 공통적인 특색은 실재관에 의하여 고정화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사찰 중심의 선정이 행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은 능동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있는 그대로를 꿰뚫어보는 반야지(般若智)를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서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에 근거한 자리(自利)·이타를 삼매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가 되는 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가지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이 지와 관은 상호보조의 관계에 있으며, 나아가서는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 가운데 정과 혜가 동시에 나타나고 체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지관으로 모든 선관(禪觀)을 통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 大智度論≫은 외도선(外道禪)·성문선(聲聞禪)·보살선(菩薩禪)으로 분류하였고, ≪능가경 楞伽經≫에서는 외도와 소승의 선인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 객체는 모두 실체가 없다는 의미를 관찰하는 관찰의선(觀察義禪), 모든 분별을 떠나는 반연여선(攀緣如禪), 일체중생의 제도에 전념하는 여래선(如來禪)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었다. 명상을 중심으로 한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로 보고 있지만,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 능동적인 선은 북위(北魏) 때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의하여 전래되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 二入四行論≫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번뇌인 객진(客塵)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 본래 청정한 마음을 직관한다는 것이다. 이 선법은 석가모니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祖)가 계속 이어져 내려와서 달마에 이르렀다. 달마가 중국에 이 선법을 전하여 달마-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으로 이어지는 선의 맥이 형성되었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과 여래선 등을 수용함으로써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생활선(生活禪)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선의 근본 기치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긴 것이다.

또한, 선의 체험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 선의 지도에 있어서는 개별성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됨에 따라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매우 친밀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조사(祖師)의 권위는 경우에 따라서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그 선을 조사선(祖師禪)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조사의 언어와 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으며, 이것이 정형화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다.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의 원류는 인도에 있으며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완전히 꽃을 피운 곳은 중국이었다. 그 뒤 선사상은 중국 고유의 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일어나도록 하였으며, 예술과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선의 전래와 구산선문

우리 나라에 선불교(禪佛敎)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800년대이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선이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달마선(達磨禪)이 아직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인 4조 도신(道信)으로부터 선법을 전수받은 법랑(法朗)이 통일신라 초기에 최초로 선을 전하였다. 이어서 신행(神行)이 신수(神秀) 계통의 북종선(北宗禪)을 전하였다.

그러나 선이 신라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남종선(南宗禪) 계통의 지장(智藏)으로부터 심인(心印)을 이어받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821년(헌덕왕 13)과 826년(흥덕왕 1)에 귀국하여 선법을 펼치게 된 이후의 일이다. 그 뒤 입당승(入唐僧)들이 귀국하면서 중국의 여러 선풍(禪風)을 전하였고, 국내에 많은 선찰(禪刹)이 창건됨에 따라 선풍진작의 거점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신라 말기부터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차례로 형성되었다.

가지산파(迦智山派)는 도의(道義)를 개산조로 삼고 있다. 도의는 821년에 귀국하여 남종선을 처음으로 신라에 전하였다. 그러나 무념무수(無念無修)를 그 심요(心要)로 하고 문답을 전개하는 가운데 심인(心印)을 전하려 하였던 그의 새로운 선풍은 경교(經敎)에 젖어있던 신라불교계에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그의 심인을 얻은 염거(廉居)를 거쳐 진육(眞育)·허회(虛會) 등의 동문과 더불어 입당한 체징(體澄)이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하여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열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크게 종풍을 떨치게 됨에 따라 가지산파를 이룩하게 되었다. 가지산파에서는 도의를 개산조(開山祖), 염거를 제2조, 체징을 제3조로 하고 있으며, 체징의 뒤를 이은 영혜(英惠)·의차(義車) 등의 이름이 보인다.

실상산파(實相山派)는 홍척이 세운 종파이다. 홍척은 826년에 귀국하여 지리산에 있으면서 선법을 전하였다. 그의 교화력은 도의보다 큰 바가 있었는데, 세인들은 이들을 일러 ‘북산의남악척(北山義南岳陟)’이라고 일컬었다. 홍척이 실상사를 창건하고 여기에서 선법을 크게 선양하게 됨에 따라 실상산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교화한 제자는 수백 명에 이르며, 특히 흥덕왕과 태자 선강(宣康)의 귀의(歸依)는 두터웠다.

홍척의 귀국은 도의보다 늦었지만 신라에 선문이 개산된 것은 이 실상산파를 효시로 보아야 한다. 홍척의 제자 수철(秀澈)은 실상산파 제2조가 되었다.

동리산파(桐裏山派)는 일찍이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華嚴)을 공부하다가 당나라로 가서 지장으로부터 심인을 얻고 839년에 귀국한 혜철(惠哲)이 태안사(泰安寺)를 중심으로 하여 이룩한 선파이다. 그의 제자로는 도선(道詵)과 여선(如禪) 등이 있었다. 지장의 선을 이어받은 가지산·실상산·동리산 등의 3파가 호남에서 선풍을 떨치고 있을 때 따로 호서(湖西)에는 무염(無染)이 개산한 성주산파(聖住山派)가 있었다.

당나라에서 보철(寶鐵)의 선법을 이어받은 무염은 동방보살(東方菩薩)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845년에 귀국하자 왕자 흔(昕)의 청으로 성주사를 세워 선풍을 떨쳤다. 그의 ≪무설토론 無舌土論≫은 선과 교의 차이를 가린 것으로, 교가 응기문(應機門)·언설문(言說門)인 데 대하여 선은 정전문(正傳門)·무설문(無說門)이라고 천명하였다.

선을 제왕이 팔짱을 끼고 묵묵히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것에 비유한다면, 교는 마치 백관들이 분주하게 다니면서 직분을 지켜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성주사지는 현재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에 있다. 또한 봉림산파(鳳林山派)는 현욱(玄昱)을 개산조로 삼고 있다. 현욱은 837년(희강왕 2)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경기도 여주에 있는 혜목산(慧目山)고달사(高達寺)에서 선풍을 떨쳤다.

그의 뒤를 이은 심희(審希)는 경상남도 창원에 봉림사를 창건하여 봉림산파의 선풍을 크게 떨쳤다. 현욱은 민애왕·신무왕·문성왕·헌안왕 등 네 왕의 존숭을 받았으며, 심희도 경명왕으로부터 스승의 예우를 받았다. 봉림산파의 법맥은 심희의 뒤를 이은 자적(慈寂)에 의하여 더욱 융성해졌다.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선풍을 진작한 종파로는 사자산파(師子山派)와 사굴산파(闍崛山派)가 있다. 사자산파는 당나라 보원(普願)의 법맥을 이어받고 847년 귀국한 도윤(道允)과 그의 제자 절중(折中)이 세운 종파이다. 특히, 헌강왕은 절중의 도풍(道風)을 흠모하여 친필로 쓴 글을 보내어서 사자산 흥녕선원(興寧禪院)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키도록 한 바 있었다. 사자산파는 그 뒤 종홍(宗弘)·정지(靖智) 등에 의하여 계승되어 갔다. 흥녕선원은 오늘날 강원도 영월에 있는 법흥사(法興寺)이다.

도윤과 때를 같이하여 귀국한 범일(梵日)은 강릉 굴산사(崛山寺)에서 40여년 동안 교외별전의 선풍을 떨치면서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그의 제자인 개청(開淸)은 스승의 뜻을 이어 사굴산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신라 경문왕 때에 위앙종(潙仰宗)의 선풍을 떨친 고승으로는 순지(順之)가 있다. 위앙종에서는 일원상(一圓相)을 그려가면서 학인들을 지도하였는데, 신라에서도 순지에 의해 처음으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그는 사대팔상(四對八相)의 법과 <삼편성불론 三遍成佛論>을 제창한 바 있었는데, 삼편성불은 증리성불(證理成佛)·행만성불(行滿成佛)·시현성불(示顯成佛) 등 셋을 가리킨 것이었다. 순지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귀국한 대통(大通)도 위앙종의 개창주인 혜적(慧寂)의 문하였다.

그리고 이 시대의 대표적인 고승 중에는 혜소(慧昭)가 있다. 본래 얼굴이 검었기 때문에 흑두타(黑頭陀)라고도 일컬어졌던 그는 830년에 귀국하여 지리산 옥천사(玉泉寺)에 6조 혜능(慧能)의 영당을 세우고 선을 크게 떨쳤다. 특히 그는 신라에 처음으로 어산범패(魚山梵唄)를 전하였다. 이 혜소로부터 남종선을 이어받은 도헌(道憲)은 문경 봉암사(鳳巖寺)를 중심으로 크게 선풍을 진작하고 희양산파를 이루었다.

이 밖에도 88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여 선풍을 크게 떨쳤던 행적(行寂), 원성왕 때의 무착(無著), 헌강왕 때의 홍각(弘覺) 등 그 계보를 알 수 없는 선사들도 많이 있어서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불교계는 선불교로 뒤덮인 감이 있었다.

선풍이 크게 떨칠 수 있었던 당시는 통일 초기의 율령체제가 붕괴되고 고대적인 국가질서가 해체되어 갔던 시기로서, 이때는 귀족의 증가에 따르는 지배계층 자체 내의 도태로 말미암은 방계 귀족의 억압과 귀족들 사이의 마찰이 심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성주산파를 개산한 무염도 그 조부 때에는 진골(眞骨)이었으나 아버지 범청(範淸)에 이르러서는 6두품(六頭品)으로 그 신분이 1등급 하강되었으며, 실상산파의 제2조 수철도 증조부 때는 진골이었으나 그 뒤로는 신분이 하강되었다. 선종은 대개 이러한 신분을 지닌 조사(祖師)들에 의하여 영도되어 교종의 전통적인 권위에 대하여 반성을 가하는 동시에,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인 사고방식에 맞설만한 새로운 체질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즉, 고대 지성에 대응하는 중세적인 지성으로서의 선종을 모색하였던 것이며, 이는 중앙의 귀족적 진골과의 대립이라는 사회현상이 불교계에 반영된 하나의 움직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선문구산 중에서 수미산파(須彌山派)는 신라때가 아닌 고려 초기에 성립된 종파이다. 중국에서 형철(逈徹)·경유(慶猷)·여엄(麗嚴) 등과 함께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士)로 일컬어졌던 이엄(利嚴)은 932년(태조 15) 해주 수미산에 광조사(廣照寺)를 창건하여 선풍을 크게 떨쳤으며, 그의 문하에 처광(處光)·도인(道忍) 등이 배출되어 법맥을 전함으로써 수미산파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선

고려의 태조는 후삼국의 통일과 함께 선종의 많은 승려들에게 귀의하였다. 태조가 존경하여 크게 대우하였던 고승으로는 도선(道詵)·경보(慶甫)·윤다(允多)·충담(忠湛)·진공(眞空)·장순(長純)·긍양(兢讓)·현휘(玄暉)·여엄·찬유(璨幽)·진경(眞鏡) 등이 있다. 이들이 태조와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를 맺음에 따라 고려 초기에는 선불교가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선종에만 유의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 불교인 교종에도 관심을 기울여 그 당시 불교계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전통적 불교의식의 부활이라든가 교종 사찰의 개축, 건립 등이 그것이었다. 따라서 전통불교인 교종과 새로운 혁신불교인 선종의 대립은 종식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숙종 때의 의천(義天)은 구산선문에 대한 비판적 안목에서 천태종(天太宗)을 세우고 선교회통(禪敎會通)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기존의 교종과 천태종으로 말미암아 선종은 차차 그 힘이 약화되어 갔다. 이때 거사(居士)였던 이자현(李資賢)이 선을 닦아 새로운 선의 부흥을 도모하였다. 이자현은 순종 때 벼슬을 버리고 뜻하는 바가 있어 ≪설봉어록 雪峯語錄≫과 ≪능엄경 楞嚴經≫을 가지고 전국의 이름있는 산을 찾아다니며 혼자 수도하여 불도를 깨달았다.

이자현은 고려에 있어서의 선학독립(禪學獨立)의 제1인자로서 지눌(知訥)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자현의 뒤를 이어 승현(昇賢)·탄연(坦然)·권적(權適) 등 많은 사람들이 선문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학일(學一)은 ≪반야경≫에서 입선(入禪)하는 방법을 찾아 운문사(雲門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고려 중기에 우리 나라 선종을 크게 진흥시킨 고승은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이다. 지눌은 1182년(명종 12) 25세의 나이로 승선(僧選)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 나주의 청원사(淸院寺), 하가산 보문사(普門寺) 등지에서 깨달음을 얻고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였다. 1200년(신종 3)에는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11년 동안 불도를 담론하고 선을 닦기에 힘썼는데, 그의 덕을 사모한 이가 사방에서 모여 크게 선풍을 떨쳤다.

문도를 지도할 때는 언제나 ≪금강경≫·≪육조단경 六祖壇經≫·≪화엄론 華嚴論≫으로 강론하였으며,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徑截門)의 3문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침으로써 선풍을 크게 떨치게 된 것이다. 희종은 지눌이 거처하는 송광산 길상사에 친서로 제방(題榜)을 내려 ‘조계산수선사(曹溪山修禪社)’로 고친 후 이곳을 엄격한 수도도량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수선사는 이후 16국사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을 잡게 되었다.

지눌은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선이요,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교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과 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를 선교합일의 주창자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구현자로 추앙하고 있다. 지눌의 문하에서는 승형(承逈)·혜심(慧諶)·혼원(混元)·천영(天英)·충지(冲止) 등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고려 중기의 불교계를 이끌어갔다.

특히 승형은 지눌의 문하에서 공부한 뒤 청평산에 있는 이자현의 유적을 찾아가 그의 <문수사기 文殊寺記>를 보고는 ≪능엄경≫이 깨달음의 요로인 것을 알아 그곳에 머물러 능엄선을 공부하였다.

혜심은 ≪선문염송 禪門拈頌≫ 30권을 저술하여 수선사 승려의 수행지침을 마련함으로써 수선사를 더욱 튼튼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제2세인 혜심의 뒤를 이은 수선사 제3세는 청진국사(淸眞國師), 제4세는 혼원(混元), 제5세는 천영, 제6세는 충지(冲止)이다. 이들은 고려 중기 선종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후기의 선종을 꽃피운 고승으로는 복구(復丘)·보우(普愚)·혜근(慧勤) 등이 있다. 복구는 수선사 제13세로서 오로지 수도에만 힘쓰면서 후학들을 지도한 고승이었다. 보우는 임제종(臨濟宗)을 도입하여 새로운 선문의 조류를 형성하였고, 고려 말기의 불교계에 생기를 불어넣은 점에서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이다. 그는 선문구산을 일문(一門)으로 통합하고 산 이름을 ‘도존(道存)’이라 할 것을 공민왕에게 건의하였고, 간화선(看話禪)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나옹(懶翁)으로 널리 알려진 혜근은 우주를 각계(覺界)로 삼고 만유를 불신(佛身)으로 보며 천지일월산천초목(天地日月山川草木)을 법(法)과 심(心)으로 삼는 독특한 선관을 보이고 있다. 이 밖에도 경한(景閑)은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하였고, ≪선문보장록 禪門寶藏錄≫을 저술한 천책(天頙)은 조사선사상(祖師禪思想)을 크게 부각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조선시대의 선

조선시대의 선종은 고려 말기의 고승 가운데 보우의 계열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까닭은 나옹의 법맥이 나옹·자초(自超) 다음으로 이어지는 기화(己和)에 이르러서 뚜렷한 문도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보우의 법맥은 조선 초기에 정심(淨心)에 의해서 계승되어 임제선(臨濟禪)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의 선교양종(禪敎兩宗) 속에서 격외선(格外禪) 중심의 조사선풍이 차츰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조선 초기의 억불정책 속에서 은둔불교로 전락된 불교는 그 가치관까지 중생교화의 차원에서 은둔과 자기개발로 바뀌어갔다. 따라서 선도 천지를 뒤엎고 자연 속에 일체의 가치를 일단 부정하는 여래선(如來禪)의 흐름보다는 자연과 현실 속에 모든 세계를 그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조사선(祖師禪) 쪽으로 선회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최고의 고승인 휴정(休靜)은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의 관직까지 맡았지만 선과 교의 병행보다는 선과 교의 기초 위에 조사선을 지향하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천명하였다.

휴정은 교를 선에 이르는 입문의 가르침으로 파악한 반면, 선은 교와 타협할 필요조차 없는 독자적인 길이라고 보았고, 그 선은 조사선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의 저서인 ≪선교석 禪敎釋≫은 선이 교와는 비교될 수 없는 우위에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고, ≪선가금설록 禪家金屑錄≫에서는 조사선에 이르는 방법을 치중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 뒤 조선시대의 선은 휴정의 문도와 휴정의 사제인 부휴(浮休)의 문도들에 의해 매우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휴정의 문하에서는 사명문(泗溟門)·편양문(鞭羊門)·소요문(逍遙門)·정관문(靜觀門) 등 4대문파가 생겨났고, 부휴의 문하에서는 벽암문(碧巖門)·고한문(孤閑門) 등 7대문파가 생겨나서 조선 후기까지 그 법맥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는 선종의 법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선만을 중요시하지 않고 선과 함께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교학과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에도 크게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사기시대(私記時代)에 백파(白坡)가 임제의 삼구(三句) 가운데 제1구에 조사선을, 제2구에 여래선을, 제3구에 의리선(義理禪)을 적용시켜 ≪선문수경 禪門手鏡≫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젊은 학승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근본 이유로서 임제의 삼구와 3종선(三種禪)을 적용시킬 만한 사상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여래선과 의리선은 이름의 차이만 있을 뿐 내용상으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약 150년에 걸쳐 초의(草衣)·추사(秋史)·우담(優曇)·축원(竺源) 등이 새로운 저술을 통하여 논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논쟁과 선·화엄·염불의 혼합된 수행으로 조선시대 후기의 선은 뚜렷한 맥락을 잡지 못하는 혼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때에 경허(鏡虛)가 출현하여 조사선의 전통을 올바로 정립하였으며, 그 법맥이 만공(滿空)·한암(漢巖) 등에게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선사상연구』(한기두, 1975)
『선종사상사』(김동화, 보련각, 1985)
「신라시대의 선(禪)사상」(한기두, 『한국불교학』 1집, 한국불교학회,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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