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신라 말에, 형성된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하나인 산문.
#설립 사굴산파(闍崛山派)는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梵日)을 개조로 한다. 범일은 831년(흥덕왕 6) 무렵 당나라에 들어가 염관제안(鹽官齊安)과 약산유엄(藥山惟儼) 등의 문하에서 남종선을 배우고 847년(문성왕 9) 귀국한 선승이다. 851년(문성왕 13) 명주 도독 김공(金公)의 청으로 명주 굴산사(崛山寺)에 주석하며 산문을 개창하였다. 범일을 명주, 즉 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으로 초청하여 사굴산문의 개창을 후원한 명주 도독 김공에 대해서는 김주원(金周元)계의 후예이거나 김주원계와 관련된 인물로 보고 있으나 근래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굴산파가 시작된 굴산사는 고려시대까지는 절이 존속했으나 고려 말, 조선 초 무렵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 승탑 등이 남아 있고, 범일이 입적한 뒤 왕명으로 세운 탑비는 없어졌으나 일부 비편이 발견되었다.
범일 입적 후 범일비 건립을 주도한 제자가 개청으로, 그는 굴산사에 계속 머물다 명주 지장선원(知藏禪院), 즉 보현사(普賢寺)로 옮겨가 930년 보현사에서 입적했고, 940년 개청의 비석이 세워졌다. 행적은 범일에게서 출가한 후 당나라 유학을 떠났으나, 귀국한 후 다시 범일을 찾아왔으며, 범일이 병이 들자 굴산사로 돌아와 범일의 곁에 있었다. 그는 삭주(朔州)에 건자난야(建子蘭若)를 세우고 문도를 양성했고, 명요부인(明瑤夫人)의 요청으로 울산 석남산사(石南山寺)에 머물다 916년 입적했고, 954년(광종 5) 태자사(太子寺)에 비석이 세워졌다. 이 외에도 여철(如哲), 양경(讓景), 윤정(允正), 석초(釋超) 등이 활동하였다. 사굴산파는 고려 중기에도 주요 산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혜소국사(慧炤國師) 담진(曇眞)은 송에 유학가 임제선을 배워 왔고, 그의 제자인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은 송나라 임제 승려와 편지를 통해 활발히 교류하였다. 이들은 예종과 인종대 왕사나 국사에 책봉되며 불교계를 이끌었다. 예종의 아들인 대선사 지인(之印)이 담진에게 출가하여 사굴산파에 속하였고, 탄연은 이자현(李資玄) 등에게 『능엄경(楞嚴經)』을 강의하며 새로운 선풍을 전했다. 담진의 손제자인 조응(祖應) 등은 용문사(龍門寺)를 중창하고 담선법회(談禪法會)를 열기도 하는 등 12세기 사굴산파는 크게 부흥하였다. 무신정권기 사굴산파를 주도하던 담진계가 위축되는 대신, 사굴산파 안에서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당시 불교계를 비판하며 새롭게 수선결사를 개창하였다. 수선사는 개창 초기에는 사굴산파에 대한 계승 인식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4세 사주인 혼원(混元) 이후가 되면 사굴산파의 계승을 표방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6세 사주인 충지(冲止)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4세기에 공민왕대에는 수선사 13세인 각진국사 복구(覺眞國師 復丘)가 왕사에 책봉되었다. 또한 고려 말 불교계를 이끌며 공민왕대 왕사에 책봉된 나옹혜근(懶翁惠勤)이나 우왕대 국사가 되었던 환암혼수(幻庵混脩) 등도 사굴산파 출신이었다.변천 및 현황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조당집(祖堂集)』 17
- 『한국선종약사』(권상로, 불교학논문집, 1959)
- 『선종구산내력』(김영수, 1937)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조선총독부, 1919)
-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 신문관, 1918)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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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김상영, 「高麗時代 禪門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 정동락, 「崛山門 梵日國師 관련 자료의 검토」(『한국고대사탐구』 33,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 조영록, 「崛山祖師 梵日 新傳」(『한국사상사학보』 33, 한국사상사학회, 2016)
- 한기문, 「新羅末 禪宗 寺院의 形成과 構造」 (『한국선학』 2, 한국선학회, 2001)
- 황인규, 「고려전기 闍崛山門系 고승과 禪宗界」 (『한국선학』 17, 한국선학회, 2007)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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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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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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