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산사는 신라 하대에 형성된 9개의 선종산문 가운데 사굴사문(闍堀山門)의 본거지 였으며, 851년(문성왕 13) 범일선사(梵日禪師, 810~889)가 명주도독(溟州都督) 김공(金公)의 요청으로 이곳에 주석하여 사굴산문을 처음 열었던 곳이다.
범일의 출생과 굴산사의 창건 내력 그리고 몇몇 행적에 대해서는 『조당집(祖堂集)』, 『삼국유사(三國遺事)』, 『강릉지장선원 낭원대사오진탑비(江陵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 『임영지(臨瀛誌)』 등의 문헌과 고승탑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굴산사는 창건 이후의 변천과정과 폐사시기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간행된 여러 관찬사서 · 사찬 읍지류에 관련 기록이 전혀 없어 대체로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굴산사지 주변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석조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범일의 승탑으로 전해오는 강릉 굴산사지 승탑(보물, 1963년 지정)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 강릉 굴산사지 석불좌상(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범일의 탄생설화가 깃든 석천(石泉)과 학바위 등이 남아 있어 당시 굴산사의 옛모습과 위상을 짐작케 한다.
굴산사의 옛 절터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대홍수 때 밭경작지 일대에서 주춧돌과 계단 등 일부 건물지와 기와편이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인식되었다. 그 후 40여 년 동안 굴산사지에 대한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1975년에 이르러 가톨릭관동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해 범일의 부도탑비로 추정되는 비석편을 비롯해 부도탑재, 석조불상, ‘屈山寺(굴산사)’ 명문기와 등 많은 유물이 수습되어 절터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었다.
이후 1983년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농업용수 개발을 위한 매설공사에 따른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해 건물지 기단과 축대 일부가 확인되었고, ‘屈山寺(굴산사)’ · ‘五臺山(오대산)’ 명문기와 등이 출토되어 굴산사의 중심절터가 재확인되었다. 1998년부터 1999년 사이 범일의 부도탑으로 전해오는 굴산사지 승탑의 해체복원과 정비를 위한 학술조사가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진행되어, 부도탑 주변에 흩어져 있거나 매몰된 부도 조각을 찾아내어 팔각원당형 부도탑으로 복원하였으며, 그 주변에서 부도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 일부가 확인되었다.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해 굴산사지 동쪽 앞을 흐르던 어단천(於丹川)이 범람하여 절터의 중심부가 유실되면서 여러 건물지의 주춧돌과 축대, 기와편들이 다수 드러나게 되자,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긴급수습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동-서 140m, 남-북 250m 이르는 절터의 범위가 대략 파악되었고, 법당으로 추정되는 제법 큰 규모의 건물지와 승방, 회랑 등과 관련된 건물지 일부가 확인되었으며, 많은 양의 고려시대 청자와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굴산사지는 역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3년 6월 2일 '강릉 굴산사지'라는 이름으로 200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10년 강릉시와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중원문화유산연구소)가 '굴산사지 문화재 학술조사연구 및 정비복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2016년까지 굴산사지에 대한 시 · 발굴조사가 7차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 건물지 30개소를 비롯해 담장지, 연못지, 배수로, 출입문지, 보도시설, 방아터, 계단지 · 부도탑지하석실 등 다양한 유구들이 새롭게 확인되었으며, 동종(銅鐘)편 · 쇠와 흙으로 구워 만든 철마(鐵馬)와 토마(土馬) · 부도탑재 · 탑비의 귀부 · 탑비석편 · 소조불상 등의 유물을 비롯해 ‘天慶三年(천경삼년)’ · ‘五臺山金剛社(오대산금강사)’ · ‘屈山寺(굴산사)’ · ‘崛山寺(굴산사)’ · ‘五臺山(오대산)’ · '天啓五年(천계5년)'명문 평기와류와 사래기와 · 치미 · 이형기와 등의 특수기와, 고려시대 청자 및 백자, 중국도자, 분청사기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수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굴산사지는 비록 창건기 가람구조가 정확히 확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사굴산문의 본산(本山)으로서 그 역사성에 걸맞게 승려의 수행과 생활, 선승에 대한 추모공간 등으로 구성된 성격의 각기 다른 복수의 단위공간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사찰 가람으로 조성되어 운영되었음이 밝혀졌으며, 12세기를 전후에 증 · 개축을 통해 여러차례 변화과정을 겪으면서 여말선초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폐사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승탑하부의 매장시설은 길이 3.4m, 너비 1.75m 규모의 초대형 석실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굴산사 폐사 이후 절터 일부 지역은 1625년(인조 3) 강릉부사와 지역유림들이 율곡 이이(栗谷李珥, 1536~1584)선생의 위패를 모신 석천묘(石川廟, 송담서원의 전신)를 건립하여 운영된 사실도 드러나게 되었다.
강릉굴산사지는 오늘날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으로 모셔지고 있는 범일선사가 개산한 신라하대 사굴산문의 본산이자 근본도량으로서 그 역사적 위상과 가치는 매우 높다. 현재까지 창건기 가람 양상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규모의 사찰 가람을 조성하여 운영되었다는 점,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오대산 남대 지장암의 신앙결사체인 '금강사'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 범일의 승탑으로 전해지는 굴산사지 부도 외에 또 다른 2기의 부도탑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제물의 성격을 띠는 말모양의 형상을 통해 민속신앙과 관련된 제의행위가 있었다는 점, 폐사된 이후 율곡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건립되어 운영되었다는 점 등 여러 정황들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앞으로 우리나라 선종9산의 가람배치 구조와 변천 양상 뿐 아니라 사굴산문의 불교사적 위치와 불교문화의 전개 양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