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일대에 분포한 2003년 사적으로 지정된 강릉 굴산사지 동북쪽 낮은 구릉에 있다. 승탑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양식으로 기단 하대석 면석의 경사 처리, 기단부 상, 하대석 사이에 둔 커단란 수반형 받침석, 8각을 지키면서도 둥근 형태를 보이는 기단 상대석과 받침석 등에서 새로운 수법이 보인다. 굴산사는 통요(通堯)대사범일(梵一)이 창건, 혹은 주석하여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闍崛山門)의 본산이 된 곳으로, 이 절터 뒤쪽 경사지에 남아 있는 이 승탑은 양식상 대사가 입적한 889년경에 굴산사에 조성되었다고 전하는 그의 사리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굴산사는 9세기 중반부터 통요대사범일이 40여 년간 주석한 사굴산문의 본산이다. 구산선문 중 조선 초기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사굴산문과 굴산사의 역사나 가람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현 학산리 일대에 절터와 사찰 관련 유물들인 굴산사지 승탑,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범일의 탄생과 관련한 석천(石泉), 8각형 승탑 탑신 부재, 고려시대 석불 등이 산재하고 있다.
1983년, 2010년, 2011년 발굴에 의하면 굴산사의 중심 절터는 이 승탑을 포함한 학산천 서쪽 평지로, 화재로 인해 일시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토 유물들이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중반기의 유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으로 위축되었다가 13세기 몽고 난으로 급격히 사세가 기울어 조선 전기 기록에도 보이지 않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굴곡을 반영하듯 승탑이 조성된 후 세워진 탑비는 흔적도 없고 1912년경에 촬영된 사진에 의하면 승탑도 어느 시기인가 도괴되어 일부 부재가 파괴되었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8월 27일 보물로 지정되었으나, 1935년 6월 7일에 지하 석실의 유물이 도굴되며 무너졌던 것을 1943년 2월에 복원하였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1983년 농업용수로 공사 중 유구와 유물의 추가 발견과 이로 인한 발굴 결과를 기초로 1999년에 복원 문제가 논의되어 6월에 해체, 복원되었다. 이때 파괴된 기단부 받침을 발견된 파편을 참조하여 원형대로 복원하고 떨어져 있는 상륜부재들을 1912년 사진을 참조하여 순서대로 올려놓았다.
굴산사지 승탑은 기단 하대부가 둥근 형태이나, 전체적으로 기단, 탑신, 옥개석, 상륜부가 8각으로 일반적인 8각원당형 승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기단부는 독특한 형태로 구성된 3단의 하대, 8각 평면의 중대, 하부에 연화가 장식된 상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하대 하단석은 8각형으로 커다란 돌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데, 밑에는 넓은 지대석을 표현하고 위로 좁아지는 경사진 면 각 면에 사자를 가득 채워 조각하였다. 사자는 발이나 머리가 입체적이어서 지대석의 공간으로 돌출되었으며 면석 위로는 다시 갑석 형태의 굽형을 모각하고 상부 중앙에 각, 호 2단의 8각 괴임단을 두어 중단석을 받치고 있다.
기단 하대 중단석은 주위에서 수습된 파편을 참고하여 복원한 것으로, 모서리 8개가 돌출된 굴곡진 둥근 수반 형태로 아래 2단의 괴임을 두고 외부에서 상단에 이르기까지 구름이 새겨져 있으며 내부에는 8엽의 연화문을 돌리고 각 연잎 중앙으로 상단의 구름이 상서롭게 흐르게 하였다. 연잎 사이에도 다시 연잎을 새겼으며 중앙에는 8각의 괴임단을 두어 8각 2단으로 표현된 별도의 받침석과 상단석을 받치고 있다.
기단 하대 상단석은 아래 별석 받침과 맞물리는 낮은 8각 괴임을 두고 반구형의 둥근 형태로 조성되었으며 표면에는 3단의 각기 다른 형태의 운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 중앙에는 8각의 괴임단이 있어 기단 중대석을 받고 있으며 둘러진 좁은 물도랑은 주위 구름문 사이 낮은 곳에 홈을 두어 물이 빠지게 연결하였다.
기단 중대석은 8각으로 모서리마다 굽이치는 구름으로 기둥을 세우고 각 면에는 연화좌에서 장구, 훈, 동발, 비파, 소, 생황, 공후, 적 등을 연주하는 주악천인상을 운동감 있게 새겼다.
기단 상대석은 아래 낮은 괴임단을 두고 위로 다소 투박한 8엽의 연화와 겹쳐진 사이 연잎을 둘러 장식하였는데 연잎 내부에 과장된 화문이 새겨져 있다. 그 위로 갑석형태의 굽형 1단이 새겨지고 중앙에 각, 호, 각의 괴임단을 두어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약간 좁아지는 8각 형태로 각 면에 우주가 얕게 모각되었으며 앞뒤 2면에 문비와 자물쇠가 표현되었다.
옥개석은 하부에 다소 넓은 각, 호, 각의 괴임단을 두어 탑신석 상부와 연결되고 있으며 각 모서리에는 추녀, 사래, 공포구조를 간략화한 부재를 모각하고 1층 처마 안 지붕 내부 공간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낙수면과 처마가 직선형이며 우동마루도 소략하게 조각되었다. 위로 갑석형태의 굽형 1단이 새겨져 상륜부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 앙화, 보주로 추정되고 있는 부재들이 순서대로 올려 져 있는데 노반은 8각으로 면석에 이중의 연화문이 조각되었고 위로 갑석형태의 굽형을 마련하고 윗면에 얕은 원형의 괴임단을 마련하여 앙화석을 받치고 있다. 앙화석은 밑면에 낮은 원형의 받침을 두어 노반 부재와 만나고 있으며 주위에는 내부가 장식된 8엽의 연판을 돌렸다. 위로는 각 모서리에 귀꽃이 솟고 전체적으로 문양이 조식되었으며 상부에 이르면서 보상화문 8판을 두루고 다시 8각의 굽형을 두었다. 보주석은 둥근 원형석 하단에 2중의 연화문을 장식하였는데, 상단의 연잎은 바람에 휘날리는 듯이 표현되었으며 윗면은 평면으로 다듬어져 있다.
이 승탑의 특징은 첫째, 동적인 표현이 적극적으로 사용된 점이다. 기단 하대 중단석, 기단 중대석과 상대석에서 비정형적인 구름을 역동적으로 사용하는 등 전체적으로 동적인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경향은 바람에 휘날리듯 조각된 보주석 상단의 연화에서도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둘째, 기단부가 원형화되고 있으며 커다란 굴곡형 수반 형태의 부재가 삽입되었다는 점이다.
여러 곳에서 시도된 동적인 표현은 전체적으로 이 유물의 특징으로 수렴되지 못하였으나, 기법과 형태에서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유물이다. 가장 특징적인 점은 기단 하대 중단석의 수반형 형태로, 이는 868년경에 세워진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징소탑에서 처음 소극적으로 시도되었다. 철감선사탑 기단부에는 표면에 구름이 새겨진 층단 윗면에 도랑이 표현되어 있어 양식상 유사하며 이외에도 기단부 면석의 기둥을 구름으로 표현하고 사자를 표현한 점, 윗면에 도랑이 표현된 층단 표면에 구름을 새기는 점 등도 본 유물과 유사하다.
이 양식은 이후 880년에 조성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에서 연못과 같은 수반 형태로 본격적으로 나타나며 930년경에 조성된 양평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과 고려 전반기에 조성된 공주 갑사 부도에서도 지대석 위 하단부에 연못 형태로 조성되며 이어진다. 따라서 이들 중에서 가장 유려한 형태와 구성을 보여주는 강릉 굴산사지 승탑의 수반형 기단 하대 중단석은 이러한 형태와 상징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예로 평가된다.
다음으로는 보주석에서 보이는 휘날리는 연잎의 표현이다. 이러한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하대석 연화 표현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시기의 양식적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