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1988년 전라남도 시도기념물로 지정된 월남사지에 남아 있으며 멀리 월출산 천왕봉을 뒤로 하고 과거 법당이 있던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민가에서 발견된 또 다른 석탑의 옥개석 부재는 이 절터와의 관련성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다. 북쪽 가까이 언덕에는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가 남아 있다.
월남사에 대한 본격적인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지지류(地誌類)에 진각국사혜심이 창건하였다는 간단한 기록이 전한다. 다만 인근의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에 정유재란 때 무위사를 제외하고 부근의 사찰들이 모두 소실되어 없어졌다고 하므로, 이 절도 이 시기에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임백호집(林白湖集)』권1 「과월남사유지(過月南寺遺址)」(16세기), 『고산유고(孤山遺稿)』권1 「남귀기행(南歸記行)」신해조(1611년), 이하곤의 『남유록(南遊錄)』1722년 12월 27일조의 관련 내용을 보면 이후 탑과 비만이 남겨져 명맥을 유지하다 18세기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2014년 구조적인 문제점이 발견돼 정밀 안전진단을 실시했으며 붕괴위험이 우려된다는 진단결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이 전체 해체보수를 결정했다. 해체‧보수 과정에서 청동병이 3층 탑신석 하부에서 발견되었으며, 2020년 2월 복원 후 일반에 공개하였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마찬가지로 모전석탑 양식을 보이는 3층 석탑이다. 탑 주위에는 측면과 윗면은 다듬어져 있으나 내부는 자연석 그대로인 여러 개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탑구가 둘러져 있는데 일부 부재는 깨져 있다.
지대석은 두꺼운 기단 하대석과 함께 대형 판석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는 기단 면석이 놓이는 곳에 낮은 턱을 마련하여 여러 돌로 이루어진 면석을 받고 있으며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기단 갑석은 여러 개의 다소 얇은 편평한 판석으로 하대석과 거의 동일한 폭으로 결구되었다. 윗면에는 기단부와 같이 낮은 턱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2층까지 여러 판석형 부재로 구성되었는데 대체로 모서리 한쪽은 다른 면의 측면이 기둥으로 표현되고 다른 쪽은 기둥을 모각하는 방식을 보인다. 2층은 이러한 짜임이 4매로 이루어져 좀 더 규칙적이다. 3층은 한 돌로 조성되었다. 탑신부는 옥개부와 함께 일정한 체감을 보여 주나, 초층 탑신부의 높이는 2, 3층 탑신부의 감축률이 적어 길어 보인다. 비교적 눈에 띠게 감축된 2층 탑신의 경우도 모본이 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혹은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에서 비롯한 일반형 석탑들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높은 편이며, 3층은 2층과 거의 동일하다.
옥개부는 1, 2층 받침이 호(弧), 모를 죽인 직각, 호로 이루어진 3단으로 각 단은 두껍고 여러 개의 부재로 결구되어 있다. 3층은 각, 호로 이루어진 2단으로 되어 있다. 위로는 하부 층급과 대칭된 크기와 모습으로 3단의 층급이 마련되어 상층 옥신을 받고 있다. 역시 여러 부재로 구성되었으며 3층 옥개석은 2층으로 조성되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로 추정되는 부재가 남아 있는데 노반은 우주가 표현된 몸체와 하부를 내만 시킨 지붕 형식으로 다듬은 갑석 부분이 별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로 일반적인 복발과 보상화문이 새겨진 앙화가 놓여 있다.
이 탑은 백제계, 특히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양식, 모전 석탑적인 양식, 고려시대 백제계 양식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백제계 정림사지 석탑 양식으로는 목조 건축물과 같이 초층 옥개석 폭이 기단보다 넓은 점, 공포 구조를 간략히 표현한 듯한 호, 각, 호로 중첩된 옥개석 층단 모습, 기단을 덮는 짧은 추녀와 이에 맞춘 작은 단층 기단과 탑구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모전 석탑적인 요소는 옥개석 상, 하층 받침들이 각각 작은 석재로 짜 맞추어져 3단으로 중첩되어 있고, 합각부에서 위로 살짝 들어 올려 진 것 외에는 판석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옥개석 등이다.
고려시대 백제계 석탑 양식으로는 2층 이상의 탑신 높이가 초층에 비해 크게 줄지 않은 점이다. 이는 고려시대 석탑에서 자주 찾아지는 경향으로 백제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백제 미륵사지 서탑, 정림사지 석탑, 나말려초 전환기에 세워진 왕궁리 오층석탑에서는 보이지 않는 양식이며 고려시대 백제 양식이 계승된 서천 비인(庇仁) 삼층석탑,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에서 공통적으로 찾아지는 점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의 주요한 양식적 특징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백제계열의 석탑임을 알려 준다. 한편 월남사지는 2011년 시굴조사 이후 2012년부터 현재까지 연차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유구가 고려시대의 건물지와 그에 따른 부속시설로 확인되었으나 유물은 백제 와당과 평기와를 비롯하여 통일신라 기와류, 고려시대의 기와류와 다양한 고려 청자, 금동 풍탁, 조선시대의 기와류와 자기류가 일부 확인되었다. 이 중 백제 기와류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유행하는 양식이며 고려 기와류는 대몽항쟁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양식과 동일하다. 따라서 월남사지가 13세기에 중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월남사지 석탑에 보이는 백제계 양식이 단순한 지역적 양식의 계승이 아니라 백제계 사찰의 확산에 기인함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