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의 사각 9층 소탑으로, 사찰에서 구입한 매장유산이기 때문에 출토지와 출토 당시의 상황은 확인할 수 없다. 대개 소탑은 개인이 건물 내에 두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거나 탑 내에 안치되는데, 조성 당시의 목조 건축물의 구조를 일정 부분 반영한다. 작은 금동 탑의 예로서는 보기 드물게 각 면에 페르시아풍의 화두창(花頭窓)이 표현되어 있어 그 시대의 문화 교류와 영향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에서 금 · 금동 · 청동으로 주조된 작은 불탑은 현재 20여 기가 남아 있다.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4.5155㎝로 다양하나 대체로 1020㎝ 정도이다. 이 구인사 금동구층소탑은 전체 높이가 27㎝로, 소실된 부분을 감안하면 규모가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이 소탑은 땅 속에 묻혀 있었던 듯 일부 내부 부재 틈에는 아직도 소량의 흙덩어리들이 남아 있다. 대체로 탑의 모습은 잘 보존되어 있으나 습기가 직접 닿았던 때문인지 다소 손상되었다. 청동 위에 도금된 금칠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지만 전체적으로 청동 녹으로 부식되어 있다. 특히 다른 곳보다 얇은 각 층 탑신 부위는 그 정도가 심하여 기둥의 형태가 원형으로 일부 변형되거나 페르시아풍 영창이 박락된 곳도 있다. 지붕 위 용머리와 잡상도 부식과 탈락이 많다. 현재 초층 탑신부 아래 부재들을 포함한 기단부와 복발 위 상륜 부재는 남아 있지 않다.
탑은 5층까지 각 층으로 분리되며 하나의 층은 탑신 · 옥개석 · 상층난간이 함께 주조되었고, 6층에서 9층까지와 노반, 복발은 하나의 구조로 만들어졌다. 각 층 기둥은 사각으로 안쏠림이 보이며 5층까지는 4개, 6층과 7층은 3개, 8층과 9층은 2개로 표현되었다. 6층까지 표현된 난간에는 상부가 3엽형인 풍혈 3구씩이 투각되어 있어 페르시아풍 화두식 창과 잘 어울린다.
난간이나 받침 등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초층 탑신은 2개의 사이 기둥을 두어 세장하게 구획하고 각 벽면 상단에 페르시아풍 영창이 우아하게 표현되었는데, 문양이 조각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기둥을 연결하는 창방이 있으며 사각 기둥들은 부식이 심하여 원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난간을 포함한 2층 탑신의 높이는 초층의 1/3 정도로 갑자기 낮아지며 이것이 나머지 층들의 높이와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탑은 옥개석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밀첨식 형태를 보인다. 각 층 옥개석은 기와골이 정연하며 네 모서리에는 우동마루도 뚜렷하다. 우동마루 끝에는 용머리, 그리고 그 뒤로 잡상 1구씩이 장식되어 있고, 용머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처마 밑 부분에는 물끊기 홈이 모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이 주조되어 남아 있으며, 복발 상부 중앙에는 지름 0.5㎜의 구멍이 탑 내부와 관통되어 있다.
이 탑은 조립을 위하여 4층까지는 네 모서리 상단에 작은 삼각형 받침대를 두었으며, 5층 상단에는 두 면에 연접한 넓은 직사각형 돌출부 두 곳을 대칭으로 마련해 상층의 구조물을 지탱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5층과 6층의 체감 비율이 눈에 띄게 급격하고, 복발 상부의 현상에 비추어 상륜부를 장치할 때 이를 고정시킬 수 있는 중간 밑면 구조물이 필요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부분의 일부 탑신들도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페르시아풍 영창이 표현된 유물은 1085년(선종 2)에 세워진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1379년(우왕 5)에 조성된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神勒寺普濟尊者石鐘) 앞 석등, 14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양평 수종사(水鐘寺) 경내에 있는 부도에서 출토된 금동제 9층탑 등이 있다. 이 구인사소탑의 양식은 기둥으로 벽면을 세장하게 나누고 상단에 영창을 표현한 신륵사 보제존자석등과 수종사 부도 출토 금동제 9층탑과 유사성이 보이며, 난간이 표현되고 밀첨식 형태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수종사 출토 예와도 비교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구인사 금동구층소탑은 손상되었으나 소탑 중에서는 눈에 띄는 수작으로서, 출토 상황이 밝혀진다면 그 국가유산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