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현 대웅전 앞마당에 있었으나 1977년 새로 5층석탑을 건립하면서 절 서남쪽 외곽으로 옮겨졌다. 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고 있으며, 2000년 11월 9일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동축사에 관하여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黃龍寺) 장육조(丈六條)에 창건설화가 아래와 같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 2월에 장차 용궁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자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것을 고쳐 절을 삼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 기축년(569)에 담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니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이르렀다. 배 안에는 “서축 아육왕이 누른 쇠 오만 칠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의 존상 셋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보내 인연 있는 국토에서 장육상을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는 글과 함께 불상 1구와 보살상 2구의 모형도 실려 있었다. 이에 금과 쇠는 경주에 보내져 태건(太建) 6년(574) 3월에 장육존상을 주조하였으며, 3개의 모형은 도착한 고을의 동쪽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를 세우고 편안히 모셨다가 장육상이 완성되자 황룡사로 옮겨 안치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동축사는 서축에서 보내온 황룡사 장육상의 모형을 안치하기 위해 569573년 사이에 창건된 역사 깊은 사찰이다. 그러나 1966년 당시 동축사 승려에 의해 원래 해안가 미포리(尾浦里)에 동축사가 있었으며, 현재의 동축사는 옛절의 암자였다고 주장되었다. 병자호란 때 원래의 절이 소실되자 옛 암자가 동축사가 되었다는 내용이 조사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대변해주듯 현재 전하고 있는 『한국사찰전서』와 『조선사찰사료』의 문헌 기록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즉 전자는 537년 창건, 926년 중창, 10351045년 옥인대사(玉仁大師)에 의한 3창, 1931년 완성대사(翫性大師)의 4창을 전하며, 후자는 갈료화상(葛撩和尙)이 창건, 1664년과 1686년 중창, 1834년 가선기공(嘉善琪公)에 의한 중창을 언급하고 있어, 동일한 사찰에 대한 기록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제작된 『해동지도』 울산부와 『여지도』 울산부, 19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 등 적어도 18세기 이후에 보이는 기록들은 현 동축사를 언급하는 것으로 확인되며, 이식(李植, 15841647)의 「동축사희제이수(東竺寺戲題二首)」, 홍세태(洪世泰, 16531725)와 계오(戒悟, 1773~1849) 스님의 동축사 관련 시문을 통하여 현 동축사가 적어도 17세기경에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삼층석탑은 높이 3.4m로, 각 층 옥신과 옥개석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으며 각 모서리에는 우주가 뚜렷이 모각되었다. 옥개석 받침은 1층과 2층은 5단, 3층은 폭이 넓어져 3단으로 줄어들고 있다. 3층 옥개석은 탑신과도 크기가 맞지 않고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고 있어 후대에 교란된 상태로 보인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개가 남아 있는데 석질이 탑신부와 다른 사암 계통이어서 후대에 변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대체로 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기단부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도괴된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둘려져 있다. 그 중앙에 용도 미상의 장방형 돌을 두고 위에 탑신을 두고 있으며 각 층의 옥개석도 손상된 부분이 많다.
2004년도에 삼층탑이 있던 대웅전 영역을 비롯한 사찰의 중심 영역을 시굴해 본 결과 고려시대 건물지와 조선시대 후기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고려 이전의 유적과 삼층탑의 원위치는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곳이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불상과 관련되어 창건된 바로 그 동축사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현 동축사가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법등을 이어 온 오래된 사찰이며, 교란되고 훼손이 심하지만 삼층탑은 이러한 유구한 사찰의 역사를 전해주는 유일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