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대공산성은 강릉시에서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보현산(普賢山, 해발 944m)에 축조된 석축산성으로, 일명 ‘대궁산성(大弓山城)’ ,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도 불리운다. 산성과 관련된 전설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곳을 도읍지로 정하고 군병을 훈련시키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하며, 발해의 왕인 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쌓았다고도 하여 지금의 이름인 '대공산성(大公山城)'으로 불린다. 을미의병 때 민용호(閔龍鎬, 1869~1922)가 이끈 관동의진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대공산성의 축성시기 및 배경 등 그 내력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편찬된 여러 문헌에 단편적인 기록이 전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파암산석성(把岩山石城)'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둘레는 768보(步)이고, 성안에는 작은 도랑 5개가 있는데, 그 중 3개는 가물면 마르고, 2개는 마르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동국여지지』 · 『여지도서』 · 『대동지지』 · 『증보문헌비고』 · 『연려실기술』 · 『증수임영지』 등에서는 '보현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는 1707척(尺)이고, 석축이라고 하였다. 1942년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도 '보현산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가 2000간(間)이라고 하였다. 이 산성은 기록이 전하는 여러 문헌 중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적조에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에 사용하였다가 조선 전기~중기 무렵에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대공산성은 백두대간의 대관령으로 이어지는 영동과 영서의 경계에 남고북저형을 이룬 보현산 능선부를 중심으로 남 · 북쪽의 완만한 사면과 계곡부를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남서에서 북동으로 길고, 북서에서 남동이 좁은 타원형을 띠고 있다. 산성의 정상부에서는 강릉지역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동해까지 조망되고 있어 위치 선정이 뛰어나다.
성의 동남 · 북쪽 외측은 급사면인 반면, 서남단부는 완경사의 능선으로 태백산맥 분수령을 이루는 서쪽의 곤신봉(坤申峰, 1131m)으로 이어진다. 성벽은 크기가 일정치 않은 반려암 계통의 석재를 사용해 1013단, 2.32.5m 높이의 허튼층쌓기와 내탁식으로 축조되었다. 남동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북서쪽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성의 총 길이는 약 3㎞이다. 동벽의 일부는 순수 토성으로 축조되었고, 수개처의 망대(望臺)시설로 추정되는 치성(雉城)과 같은 돌출된 석축부가 있다. 동 · 서문지가 남아 있으며, 특히 동문지에는 2m 간격의 문주초석과 그 표면에 2개의 둥근 문추공이 있다. 서문지가 위치하는 남서쪽 정상부 끝부분도 치성과 같이 돌출되어 망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평탄지가 곳곳에 조성되어 있으며, 평탄지에는 고려~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많은 양의 어골문 · 복합문 계통의 기와편을 비롯해 토기편, 백자편, 소량의 청자편이 산재하고 있다. 동문지 부근의 소곡지에는 우물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정밀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축조 및 폐성시기, 축성 배경, 변천과정 등 그 역사적 성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 는 없으나, 산성의 지리적 위치 및 입지조건, 성벽의 축조상태, 추정 건물내에서 출토된 유물, 문헌자료 등 여러 정황을 함께 미루어 볼때 삼국시대가 아닌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몽골 · 거란 · 왜구 등의 외세 침입에 따른 입보용 피난성의 목적으로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릉대공산성은 해발고도가 비교적 높은 고산지대에 쌓은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우리나라 중세 성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산성의 지리적 위치 및 입지조건, 축조방식을 고려해 볼 때 영동지방의 속초 권금성, 강릉 금강산성, 강릉 제왕산성, 동해 두타산성 등과 함께 몽고, 거란, 왜구 등 외세침입에 따른 피난목적의 입보용산성으로 축조되어 운영되었으며, 을미의병 때 민용호가 이끈 관동의진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호국유적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