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금진리유적의 남쪽 가까이에는 옥계지역의 젖줄인 낙풍천과 주수천이 합류하여 동해로 빠져나가고, 서쪽과 서남쪽으로는 가평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유적의 존재는 1984년 서울대학교 고고학조사단과 1994년 관동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2006년 예맥문화재연구원에서 소규모 주택 신축부지와 한국여성수련원 건립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신석기시대 야외노지 1기, 철기시대 철자형(凸字形) 주거지 4기, 여자형(呂字形) 주거지 5기, 수혈유구 3기 등이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야외노지는 강원 영동지방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반타원형으로 굴착하여 비교적 작은 냇돌과 할석을 상부에 올려 놓아 식재료 조리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야외노지에서 수습된 목탄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2480~2680년으로 신석기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철기시대 주거지들은 전체 평면형태가 여자형과 철자형으로 구분되며, 주 생활공간인 주거지 남벽 중앙에 출입구 혹은 작은방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설치하였다. 주 생활공간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방형 또는 장방형을 띠나 철자형주거지의 변형으로 오각형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도 있다. 주거지의 주축방향은 모두 남-북방향이며, 출입구 또한 모두 남쪽을 향해 있다. 조사된 주거지들은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면적은 34~62㎡ 정도이다. 그러나 7기의 주거지들과 약 20m 거리를 두고 있는 8호 주거지는 장축 길이 18.3m, 면적 173.2㎡에 이르는 초대형 주거지로서 주거용으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마을 내 집단적 공동행위 장소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주거지의 바닥시설은 모두 점토다짐을 하였으며, 8호 주거지를 제외한 모든 주거지에 노지[화덕자리]를 설치하였는데, 막음돌+점토띠식 노지, 점토띠식 노지, 무시설식 노지로 구분된다. 주혈[기둥구멍]은 대부분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기둥의 흔적으로 보이는 목탄흔이 주거지 모서리에서 일부 확인되고 있으며, 여자형주거지에서는 문지방 시설과 벽체의 판자벽이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유물은 "중도식무문토기"라 불리는 외반구연호를 비롯한 경질무문토기류 131점, 외면에 격자타날된 단경호류 25점, 시루 1점이 출토되었으며, 문화층에서 신라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경부돌대문토기편이 수습되었다.
강릉금진리유적은 현재 전체 유적범위 중에 일부만이 조사되어 여자형, 철자형주거지의 전체적인 배치양상과 주거지 유구 간의 선후관계를 파악할 만한 뚜렷한 근거가 부족하지만, 기존의 강원 영동지역의 철기시대 주거지에 대한 조사 연구성과와 목탄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를 함께 고려하면, 유적의 중심연대는 2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후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릉금진리유적은 동해안지역의 철기시대 취락 연구 뿐 아니라 주거건축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점, 4세기 중후반경에 이르러 강릉과 삼척지역에 존재했던 동예(東濊)사회의 전통문화의 양상과 변천 그리고 신라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