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윤다는 고려 전기 구산선문 중 동리산문의 제3조인 승려다. 혜철의 제자인 여선사에게 선법을 익혀 동리산문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고려 태조의 초청을 받아 흥왕사에 머물기도 하였으며, 왕자 왕욱이 제자가 되는 등 왕실과의 관계가 돈독하였고, 동리산문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후 태안사로 돌아와 945년에 입적하였다. 제자들에게 계율을 강조하고, 선을 익히면서 경전에도 의지하는 선·교융합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왕이 탑과 탑비 건립을 명하였고, 태안사에 세워져 있다. 시호는 광자대사(廣慈大師)이다.
정의
고려 전기 구산선문 중 동리산파의 제3조인 승려.
가계 및 인적사항
8세에 집을 떠나 사방을 다니다가 태안사가 있는 동리산에서 상방화상(上方和尙), 즉 여선사(如禪師)를 친견하고 제자가 되었다.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 일심으로 참구하여 묘지(妙旨)를 깨닫고 현기(玄機)를 통달하였다.
여선사는 동리산문의 개조인 혜철의 제자로, 서당지장-혜철-여선사로 이어지는 동리산문의 법맥이 윤다에게로 이어져 동리산문의 제3조가 되었다.
주요 활동
945년에 제자들을 불러, “생은 유한하고 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지금 가고자 하니 너희들은 정중히 받아들여라. 부처님이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가 너의 큰 스승이라 하셨는데, 나 또한 이 말을 너희에게 부촉하노니 너희들이 잘 받들어 행한다면 나는 죽지 않은 것이 되리라.”고 말한 후 입적하였다.
선승이면서도 임종 때까지 계율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당부할 만큼 율법을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학(無學)의 종자인 선(禪)을 배우되 경전의 게송에 의지하고, 무사(無師)의 취지를 스승으로 하되 수다라(修多羅), 즉 경전을 가자(假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선교융합의 사상은 혜철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단행본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신문관, 1918)
-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1』(가산문고, 1994)
논문
- 김두진, 「나말려초 동리산문의 성립과 그 사상; 풍수지리사상에 대한 재검토」(『동방학지』 57, 연세대국학연구원, 1988)
- 김방룡, 「나말여초 동리산문의 지형과 사상」(『보조사상』 64, 보조사상연구, 2022)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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