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양산파(曦陽山派)는 통일신라시대 말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이 지은 봉암사(鳳巖寺)에서 개창한 산문이다. 희양산문이라고도 한다. 구산선문 중 하나이며, 고려 초 정진국사(靜眞國師) 긍양(兢讓)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광종의 법안종 수용과도 관련있으며, 봉암사는 3대 부동 사원으로 지정되기도 했으니 고려시대 뚜렷한 활동상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경상북도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시작된 희양산파는 신라 말 성립된 선종 산문으로, 구산선문 중 하나이다. 희양산문이라고도 한다. 신라 말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이 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도헌의 손제자인 정진대사(靜眞大師) 긍양(兢讓)이 개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고려시대 구산선문의 내력을 정리한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에 희양산문의 조사로 도헌을 꼽기는 했으나 실제 도헌이 봉암사에 있었던 기간이 매우 짧았고, 도헌 이후 폐허가 되었던 봉암사를 새로 중창하여 희양산문의 법맥을 이어나간 것은 긍양부터라는 견해이다.
희양산문을 개창한 도헌은 824년(헌덕왕 16)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부석사로 출가하여 화엄을 배웠으나 이후 선으로 개종하였다. 선승으로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경문왕이 경주로 초청하고자 했으나 거절하였다. 864년(경문왕 4)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의 청으로 현계산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다 심충(沈忠)의 요청으로 희양산으로 옮겨가 절을 짓고, 881년(헌강왕 7)에 봉암사(鳳巖寺)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도헌은 병이 나자 봉암사에서 안락사로 옮겨 가 882년(헌강왕 8) 입적하였다. 도헌의 비는 892년 비문이 완성되었으나, 봉암사에 비석이 세워진 것은 924년(경명왕 1)이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대부분의 비석이 왕명으로 세워졌던 것과 달리 도헌의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는 왕명과 무관하게 세워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도헌이 입적하고, 「지증대사비」가 세워지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렸는데, 그 과정을 보면 신라 말의 혼란한 시대 상황에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도헌의 손제자인 정진국사 긍양은 속성은 왕씨(王氏)이고, 878년(헌강왕 4) 공주에서 태어났다. 출가 후 양부(楊孚)에게서 수학한 뒤, 중국에 가서 도연(道緣)의 문하에 있었다. 귀국 후, 935년(태조 18)에 폐허가 된 봉암사를 다시 중창하였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긍양은 스스로 태조를 찾아가 귀의했고, 태조에서 광종에 이르기까지 고려 초 4대에 걸쳐 국왕의 귀의를 받았다. 특히 광종 대 봉암사는 희양원(曦陽院)이라고도 불렸는데, 광종 대 법안종 수용과 관련하여 특별히 지정한 세 곳의 부동 사원(不動寺院)의 하나가 되어 긍양의 법손으로만 주지를 이어갈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956년(광종 6)에 봉암사에서 입적하자 정진대사(靜真大師) 탑명은 원오(圓悟)라 하고, 왕명으로 봉암사에 승탑과 비석이 세워졌다.
봉암사에는 희양산문을 개창하고 성장의 기틀을 닦은 도헌과 긍양의 승탑과 비석이 현재도 전하고 있다. 그런데 도헌의 비석인 「지증대사비」에서는 도헌이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었음을 중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헌의 계보를 북종선(北宗禪)의 4조 도신(道信)과 연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유학한 적 없는 법랑이 당에 유학해서 도신에게서 전법한 것으로 내용이 변경되면서 도헌을 북종선과 연결하였고, 고려 초 세워진 긍양의 비인 「정진대사비」 에서는 도헌의 계보를 북종선에서 남종선으로 다시 한번 변경하였다.
한편 긍양 이후 고려 불교에서 희양산문의 활동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굴산문과 가지산문이 주도하는 가운데 수미산문을 비롯한 다른 산문들이 여기저기에 보이므로, 희양산문 역시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희양산문의 중심 사찰이자 광종이 부동 산원으로 지정했던 봉암사의 변화가 주목된다. 1362년(공민왕 11)과 1381년(우왕 1)에 왕명으로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봉암사에 주석하였고, 1382년(우왕 2) 입적하자 세 곳에 보우의 승탑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한 곳이 봉암사였다. 태고 보우는 가지산문(迦智山門) 승려로서, 고려 전기 이후 희양산문이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희양산문이 점차 위축되면서 산문의 중심 사찰도 타 산문으로 소속이 바뀌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점은 고려시대 희양산문의 전개와 위상 변화 그리고 타 산문과의 관계라는 점에서 주목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희양산문의 개창 및 법통과 관련된 문제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북종선에서 남종선으로 그 중심이 급속하게 바뀌어 간 신라 하대 불교계의 정황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또한 고려시대 희양산문의 전개는 광종 대 법안종 수용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어 고려시대 개별 산문의 전개 및 선종 사상의 이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