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禪宗)의 한 산문(山門).
산문의 형성 배경
선종이 갖는 이러한 특성과 함께 9세기 중반 당의 회창(會昌) 폐불을 계기로 입당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특정 개산 조사의 법통을 계승한 문도들이 특정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산문을 지역에서 형성하였다. 선사들은 거주한 사원 단위로 각각 세력을 이루면서 서로 연결된 산문으로 성장하였다. 수 백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특정 사원을 중심으로 대집단을 이루었다. 나아가 산문은 왕실, 중앙귀족, 호족의 후원을 받아 본사를 중심으로 곳곳에 장사를 두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다.
역사적 변천
개창조인 이엄은 12세에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였고, 처음에는 교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896년(진성여왕 10)에 당에 들어가 석두 희천(石頭希遷)의 계열인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었고, 이후 각지를 순례하다가 911년(효공왕 15)에 신라에 돌아왔다. 이엄은 귀국 후 호족 소율희(蘇律熙)의 후원을 받으며 김해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후삼국의 쟁패전이 격화되면서 김해를 떠나 북으로 상주, 영동 등으로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이엄은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게 되어 개경으로 갔다. 그는 개경의 사나내원(舍那內院) 주지로 머물다가 932년에 왕건의 명으로 해주(海州)에 광조사를 짓고 주석하였다. 수미산문은 고려 태조뿐만 아니라 해주 지역의 대호족인 황보씨 세력, 박수문(朴守文)을 비롯한 개국공신 세력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광조사에 딸린 토지는 관장(官莊)을 이루었고, 규모가 거대하여 세 곳에 장원을 설치하여 경영하였다.
한편, 대경 여엄(大鏡麗嚴), 선각 형미(先覺逈微), 법경 경유(法鏡慶猶)는 이엄과 함께 사무외사(四無畏士)로 불리며, 공통적으로 운거 도응의 법맥을 계승하였는데, 이들 모두 태조의 후원을 받았다. 이엄의 제자로는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비(貞朏), 경숭(慶崇), 현조(玄照) 등이 배출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나말여초 선종산문 개창 연구』(조범환, 경인문화사, 2008)
- 『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추만호, 이론과 실천, 1992)
- 「사무외사의 선종사상과 그 사회적 성격」(김두진, 『고려 전기 교종과 선종의 교섭사상사 연구』, 일조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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