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섭불 연좌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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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 황룡사(皇龍寺)에 있었던 삼국시대 가섭불의 받침대. 좌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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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룡사(皇龍寺)에 있었던 삼국시대 가섭불의 받침대. 좌대석.
내용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象)편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조에는 533년(진흥왕 14)에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었으며, 그곳이 전불(前佛) 시대의 절터이고, 지금의 황룡사 땅은 곧 일곱 개 절 중 하나라고 서술되어 있다. 일곱 개의 절이란, 『삼국유사』 흥법(興法) 제3 아도기라조(阿道基羅條)에 나오는 아도(我道)가 고구려인인 그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전불시대의 가람터를 말한다. 또한 연좌석은 황룡사 창건 이래 화재를 겪어 돌이 터져 갈라진 곳이 있으며, 일연(一然)이 직접 찾아가 보니 연좌석이 불전 후면에 있고 돌의 높이가 5·6자 정도이며 둘레가 3주(肘) 정도 된다고 하였다. 아울러 1238년(고종 25)에 일어난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불전과 불탑이 모두 타버렸고, 이 돌도 함께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황룡사 자리가 본래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가람 터라는 주장을 제기함으로서, 신라에 고구려 신라보다 늦은 시기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신라와 불교의 인연이 깊었다는 점을 내세우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설화이다. 이 설화는 황룡사에 모신 석가여래삼존상에 대해 인도 아육왕(阿育王)이 배에 실어서 보낸 금과 동으로 만들었다는 서술과 함께 신라불국토설을 내세우면서 황룡사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 의도가 잘 드러난다.

그런데 황룡사지 발굴 조사를 통해 연좌석으로 추정되는 돌은 확인되지 않는다. 근래에 연좌석의 실체에 관한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으나 뚜렷하게 해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연좌석 또는 찰주 받침으로 추정되던 목탑지의 방형 대석은 1238년에 몽골군에 의한 전화로 목탑이 전소된 이후 사리장치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진호석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황룡사가 1탑 3금당 가람이며, 연좌석이 있던 불전을 동금당(東金堂)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이와 달리 강당에 처음부터 안치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초기 불교사 연구』(신종원, 민족사, 1992)
「삼국유사 탑상편 가섭불 연좌석조의 재검토」(김수태,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37, 2016)
「황룡사 목탑지 방형대석 검토」(김동열·천득염, 『건축역사연구』102, 2015)
「황룡사 가섭불연좌석고」(한정호, 『신라문화』44, 2014)
「신라 황룡사의 가섭불연좌석」(황수영, 『불교와 미술』,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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