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후기, 제25대 충렬왕이 중창하고 원당으로 삼은 사찰.
내용
충렬왕 대 신효사에서는 제국대장공주와 원 세조의 명복을 비는 불사도 여러 차례 개최되어 신효사가 원 세조의 원찰의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원 세조가 죽자 충렬왕은 1295년 정월 16일 원 세조의 명복을 비는 법회를 열었고, 1296년 정월에는 원 세조의 대상(大祥)일에 신효사로 행차하여 분향하였으며, 1299년 정월에도 원 세조의 기일이 되자 충렬왕이 신효사에 행차하였다. 1297년 안평공주 즉,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충렬왕은 신효사에 행차하여 공주의 명복을 빌었고, 이듬해인 1298년 안평공주의 소상을 신효사에서 열었다. 이처럼 충렬왕 대 중창 이후 신효사는 왕실에서 장례 기간 동안 불사를 여는 주요 사찰 중 하나였다.
충렬왕이 세상을 떠난 뒤 1308년 충선왕은 충렬왕의 백일재를 신효사에서 열었고, 충혜왕과 충혜왕비 덕녕공주의 진전(眞殿)이 신효사에 조성되었으며, 공민왕은 1350년과 1356년 아버지인 충숙왕의 기일재를 신효사에서 지냈다. 한편,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이 절의 등촉향도(燈燭香徒)들이 왕의 축수재(祝壽齋)를 열었는데 왕이 직접 재의 앞자리에 앉아 참여하였다. 1349년(충정왕 1)에는 이 절의 법사 수공(修公)이 불사(佛事)를 위한 계의 일종인 상주(常住)를 설치하였다. 원나라에서 출세한 고려 출신 환관인 방신우(方臣祐)가 원나라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가 시주한 금박 60여정(錠)으로 만든 금자장경(金字藏經)을 신효사에 두고 황태후를 위해 기도하였다.
1375년(우왕 9)에는 우왕이 통도사에 있던 불사리를 신효사에 안치한 뒤 불공을 드리기도 하였다. 고려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까지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에 폐허가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동문선(東文選)』
- 『목은시고』
-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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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소원을 빌기 위하여 세운 집.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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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아귀도에 떨어진 망령을 위하여 여는 불사(佛事). 목련 존자가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아 여러 수행승에게 올린 공양에서 비롯한다. 하안거(夏安居)의 끝 날인 음력 칠월 보름을 앞뒤로 한 사흘간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조상이나 부처에게 공양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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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등의 하나. 대오리나 쇠로 살을 만들고 겉에 종이나 헝겊을 씌워 안에 등잔불을 넣어서 달아 두기도 하고 들고 다니기도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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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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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백 번째 되는 날에 드리는 불공.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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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고려 시대에, 왕 등의 장수를 빌기 위하여 부처에게 올리던 공양.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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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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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아교풀에 금박을 풀어서 쓴 불교의 경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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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석가모니의 유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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