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소공(小公). 할아버지는 방양(方亮)이며, 아버지는 방득세(方得世)이다.
충렬왕(忠烈王) 때 궁중의 급사(給事)로 있다가 안평공주(安平公主)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망고태(忙古台)라는 이름을 받고 장알승(掌謁丞)을 거쳐 천부대경(泉府大卿)이 되었다. 뒤에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의 시중을 들어 장작원사(將作院使)가 된 뒤 다시 평장정사(平章政事)가 되었다.
충선왕(忠宣王) 때 요양행성(遼陽行省) 우승(右丞) 홍중희(洪重喜)가 충선왕을 원나라에 무고하자, 방신우가 수원황태후에게 말해 도리어 홍중희를 조주(潮州)에 귀양가게 하였다. 1310년(충선왕 2) 수원황태후의 명으로 고려에 파견되어 금자장경(金字藏經)을 쓰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 때 승속(僧俗) 300인으로써 민천사(旻天寺)에서 완성해 이를 신효사(神孝寺)로 옮기고 수원황태후의 복을 빌었으며, 당국으로 하여금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그 해 충선왕으로부터 중모군(中牟君)에 봉해졌으며, 개성판관(開城判官) 이광시(李光時)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다.
그 뒤 태정황후(泰定皇后)를 섬기어 총애를 받아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고, 다시 휘정원사(徽政院使)를 거쳐 저경사사(儲慶司使)가 되었다. 때마침 원나라는 삭방(朔方)의 번왕(藩王) 팔로미사(八驢迷思)가 이끄는 무리를 압록강 동쪽에 이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방신우는 “고려는 땅이 좁고 산이 많아 농사와 목축할 곳이 없으니 북쪽 사람들이 편안히 살 만한 곳이 못 되며, 한갖 동민(東民: 高麗民)을 놀라게 할 뿐입니다.”라고 원제(元帝)에 고해 중지하게 하였다.
또한, 일찍이 고려를 원나라의 성(省)으로 편입시키려는 논의가 있자 이것 또한 수원황태후에게 고해 그 논의를 중지하게 하였다. 그 공으로 충숙왕(忠肅王)으로부터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돈신 양절공신(推誠敦信亮節功臣)이 되었다.
1330년(충숙왕 17)에 귀국해 선흥사(禪興寺)를 중수하고, 1342년에는 원나라에 건너가 이듬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방신우는 원나라의 7조(朝)와 두 태후를 섬기면서 국가 기무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강남(江南)의 토지 4천 무(畝)를 하사받아 부의 축적도 많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