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년(태조 2)태조가 개성 10사(寺)의 하나로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 976년(경종 1) 왕은 팔관회(八關會)에서 행하여지는 불경스러운 잡기와 번거로움을 모두 피하기 위해 이 절에 행차하여 향을 올렸다. 1009년(목종 12) 초사흗날목종이 이 절에 행차하였고, 1035년(정종 1) 11월 14일 팔관회 때에는 왕이 신봉루(神鳳樓)에서 백관에게 저녁을 내린 뒤 이 절에 행차하였다.
1047년(문종 1) 11월 14일 팔관회 때와 1056년·1060년·1061년 11월 팔관회 때에도 문종은 이 절에 행차하였으며, 1076년 11월 팔관회 때에는 태자에게 법왕사로 가서 참배할 것을 명하였다. 1084년(선종 1) 12월 팔관회 때에도 이 절에 행차하였다. 1129년(인종 7) 9월 28일 이 절에다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을 개설하고 3일 동안 3만 명의 승려에게 반승(飯僧: 승려에게 식사를 베푸는 불교행사)하였고, 1131년 10월 10일에는 이 절에서 팔관회를 열었다.
명종과 신종도 이 절에서 팔관회를 열었으며, 희종은 1205년 9월 연등(燃燈)을 한 뒤 이 절에 행차하였다. 그 뒤에도 이 절은 고려왕들의 참배사찰로서 많은 왕들이 찾았다. 1212년(강종 1) 11월과 1217년(고종 4) 정월과 6월, 1219년 11월법왕사에 행차한 것을 비롯하여 고종은 1258년까지 매년 봄과 가을 이 절에 행차하여 공양을 올렸다.
원종은 1260년과 1266년 11월 팔관회를 열고 이 절에 행차하였으며, 충렬왕은 1295년 11월, 충숙왕은 1345년 11월 각각 팔관회를 열고 이 절에 행차하였다. 공민왕은 1368년 2월과 1369년 7월 행차하여 분향하였고, 1372년 11월 팔관회를 설치한 뒤 이 절에 행차하였으며, 공양왕은 1391년 11월 14일 팔관회를 열고 이 절에 행차하였다.
이 절은 고려시대의 팔관회와 매우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사찰로서, 팔관회 뒤에 왕이 거의 행차하여 분향하는 특수사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이 절이 국가적 대찰의 성격을 지닌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 이 절은 급격히 퇴락되었다. 『동문선』에 기록된 권근(權近)의 「조사당기(祖師堂記)」에 의하면, 당시 이 절은 계단이 무너지고 초석이 파괴되어 잡초만이 무성하던 것을 화엄종의 승려 침공(砧公)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