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사는 919년(태조 2) 태조가 개성 10사(寺)의 하나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왕성의 동북쪽의 춘궁(春宮)과 멀지 않은 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의 옛 터가 연경궁 동쪽에 있다고 하여 법왕사는 도성 안 동북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법왕사는 고려시대 국가적인 중요 의례였던 중동 팔관회에서 국왕이 행차하던 사찰이었다. 981년(성종 즉위년) 11월에는 성종이 법왕사에 가서 분향하고 구정으로 돌아와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는데, 이것도 팔관회 행차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성종이 팔관회의 주1들이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번거롭고 소란하다고 하여 모조리 폐지해 버리고 법왕사에 행차하여 분향한 뒤에 구정으로 돌아와 문무관료의 하례를 받는 것으로 행차를 마쳤다고 한다.
이규보의 「법왕사 팔관설경문(法王寺八關說經文)」을 보면 중동 팔관회날 법왕사 행차에서는 고승을 초빙하여 경전 강설을 듣는 순서가 있었다. 팔관회날 국왕의 법왕사 행차는 1391년(공양왕 3) 11월까지 계속되어 고려 말까지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법왕사에서는 팔관회 외에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를 위한 국왕 행차가 있었다. 1129년(인종 7) 9월 28일, 1131년(인종 9) 10월 10일, 1135년(인종 13) 10월 10일 법왕사에 백고좌도량을 개설하고 3일 동안 3만 명의 승려에게 반승(飯僧)을 하였다. 한편, 법왕사는 1009년(목종 12)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킨 후 목종이 주2와 함께 머문 곳이기도 하다.
고려 전기 법왕사의 종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말 선초의 기록을 보면 화엄종 승려들이 머물고 있어 화엄종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 정도전이 쓴 「송화엄종사우운시서(送華嚴宗師友雲詩序)」에 의하면 김륜(金倫)의 아들인 화엄종 승려 우운이 왕명으로 법왕사에 주석하였으며, 권근(權近)의 「조사당기(祖師堂記)」에 의하면 우운의 문인인 의침(義砧)은 1403년(태종 3) 법왕사 서방장실 남쪽 빈터에 조사당을 짓고, 시주를 모집하여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3존을 그린 그림과 화엄종 여러 조사의 상을 좌우로 나누어 봉안하였다.
의침이 조사당을 지을 무렵 법왕사는 계단이 무너지고 초석이 파괴되어 잡초만이 무성하여 퇴락한 모습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터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건국 후 급속도로 퇴락하다 조선 전기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