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의식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부터 널리 유행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찰의 낙성식이 있은 다음 국왕이 직접 반승을 베푸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반승이 끊임없이 뒤를 잇다시피 개최되었으며, 그 규모도 매우 성대하였다.
1018년(현종 9) 5월에는 왕이 10만 명을 반승하였고, 1157년(의종 11) 1월에는 왕이 승통 현희(玄曦) 등 200명의 승려를 궁으로 초대하여 반승하였다. 문종 때부터는 국왕이 사찰로 행차하여 그곳에서 반승을 열기도 하였는데, 1098년(숙종 3)에는 흥왕사(興王寺)에서 3,000명의 승려를 공양하였다.
국왕이 시주가 되어 궁중 또는 사찰에서 수시로 베풀어진 반승은 단순한 승려의 공양만을 목적으로 하여 열리지는 않았다. 사찰의 낙성과 불상의 조성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경찬법회(慶讚法會)를 비롯하여 휘신도량(諱辰道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의식)·축수도량(祝壽道場: 장수를 축원하는 의식)·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 『인왕경』을 읽으며 호국을 기원하는 의식)·장경도량(藏經道場: 경전을 독송하는 의식) 등 각종 법회가 있을 때에는 그 의식의 절차로서 대개 반승이 함께 열렸다.
1225년(고종 12) 8월에 강종의 명복을 비는 휘신도량을 열었을 때에는 200명의 승려를 공양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 5월에 있은 왕의 탄생일에는 보우(普愚)를 비롯한 108명의 승려에게 반승하였다. 특히, 국가의 태평을 기원하는 뜻에서 2년 또는 3년마다 10월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인왕백고좌도량 때에는 반드시 3일 동안에 걸쳐 3만 명의 승려들을 공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고려불교의 국가적 성격을 단적으로 말하여 주는 것이다.
1309년(충선왕 1) 9월에는 왕이 1만 명에 이르는 승려들을 공양하고 이어서 모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민천사(旻天寺)를 창건하였는데, 1311년에는 이 절에서 3,000명의 승려에게 공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위를 충숙왕에게 물려준 뒤인 1313년 9월에도 500명의 승려에게 또 공양하였다.
다시 그 해 10월에는 5일 동안에 걸쳐 매일 연경궁(延慶宮)에서 2,000명씩 반승하였는데, 이를 지칭하여 만승회(萬僧會)라 하였다. 이 때 상왕(上王)이 만승회를 위해 은병(銀甁) 100개를 희사한 것 외에도, 손수 향로를 받들어서 선종승려 충탄(沖坦)과 교종승려 효정(孝楨)을 맞이하고, 그들에게 각각 백금 1근씩을 보시하였다. 이 반승에 소요된 비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현재 사찰에서는 ‘대중공양(大衆供養)’ ‘공양청(供養請)’ 등의 표현으로 '반승'의 문화가 이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