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는 고려후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서 불교계의 통합을 도모한 승려이다. 출생년은 미상이며 1382년(우왕 8)에 사망했다.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 광지의 제자가 되었고 1338년(충숙왕 복위 7)에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1356년(공민왕 5)에 왕사로 책봉된 이후 신돈을 경계하는 글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68년에는 신돈의 참언으로 속리산에 금고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고, 정치와 불교의 혁신, 선문구산 통합 등에 대해서도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우왕 때 다시 국사로 봉해졌고, 1382년 소설산에서 입적했다.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행하였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뒤, 선(禪) 수행에 몰두하였다.
1330년(충숙왕 17)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서 관음기도를 하고, 1333년(충숙왕 복위 2) 성서(城西) 감로암(甘露庵)에서 정진하였으며, 1337년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든 알음알이를 타파한 뒤, 송도(松都)의 전단원(栴檀園)에서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던 중, 1338년 1월 크게 깨달았다.
그 뒤 양근(楊根)의 초당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며 1,700칙(則) 공안을 점검하였고, 1339년 소요산 백운암(白雲庵)에서 「백운가」를 지었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 때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1346년(충목왕 2) 원나라 연경(燕京) 대관사(大觀寺)에 머물 때, 궁중에서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였다. 1347년 7월 호주(湖州) 천호암(天湖庵)에서 석옥(石屋)에게 도를 인정받고, 「태고암가」의 발문과 가사(袈裟)를 받았다. 1348년 귀국하여 중흥사에 있다가, 미원(迷源)의 소설산(小雪山)에서 4년 동안 깨달음 뒤의 수행을 하였다. 이 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지었다.
1352년(공민왕 1) 궁중에서 설법하였으며 경룡사(敬龍寺)에 있었는데, 홍건적의 난을 피해 소설산으로 옮겼다. 1356년 왕의 청으로 봉은사(奉恩寺)에서 설법하였고, 그 해 4월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362년 왕은 그를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 있게 하였고, 1363년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옮기게 하였다.
그 때 왕에게 총애 받던 신돈(辛旽)을 경계하는 글을 올리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1368년 신돈의 참언(讒言)으로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는데, 이듬해 3월 왕이 이를 뉘우치고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371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한 뒤 영원사(營原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81년(우왕 7) 봉암사로 옮겼는데, 우왕은 다시 국사로 봉하였다.
1382년 소설산으로 돌아와서 12월 17일 입적하였다. 나이 82세, 법랍 69세였다.
그는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공민왕에게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민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묻자,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자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고, 때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라고 하였다. 또한 선문구산(禪門九山)을 통합하여 종파의 이름을 ‘도존(道存)’으로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는 혼수(混修), 찬영(粲英), 조이(祖異) 등이 있다. 『태고집(太古集)』에는 그의 사상과 경지를 알게 하는 법어와 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2권과 『태고유음(太古遺音)』 6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