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은 백제 때 창건한 이래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왔으며 1343년(충숙왕 복위 3)에 비구 중향(中向)이 중건하였다.
중향은 중건의 뜻을 품고 원나라로 자정사(資政使) 고용봉(高龍鳳)을 찾아가서 중창을 도울 것을 청하였다. 고용봉은 저폐 몇 천 냥을 줄 것을 약속하면서 절을 새로 짓고 경 · 율 · 논(經律論) 삼장(三藏)을 갖추도록 하였다.
그러나 1335년에 고용봉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쫓겨났으므로 공사를 진척시키지 못하였다. 그 뒤 복직하자 다시 시주하여 1337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1343년 겨울에 완공하였다.
이 때 세운 건물은 100여 칸으로 불전과 승당 · 객실 · 방장실(方丈室) · 해장전(海藏殿) · 향적전(香積殿) · 회랑 · 복도 · 산문 등이었으며 절 주위에는 벽을 둘렀다고 한다. 준공된 달에 화엄법회를 크게 열어서 낙성식을 가졌는데, 50여 일 동안 3,000여 대중이 모였다고 한다.
그 뒤 중향은 사찰 바깥쪽에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누각을 지었는데, 이곡(李穀)은 이 누각에 ‘심원루(心遠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절은 조선시대에 폐허화되었으며, 그 목재를 모악산(母岳山)으로 옮겨 절을 짓고 다시 ‘보광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동문선』에는 이 절과 관련된 이곡의 「중흥대화엄보광사기(重興大華嚴普光寺記)」와 「신작심원루기(新作心遠樓記)」가 있다. 절터에 남아 있던 석등(石燈)은 일본인이 반출하여 갔다고 한다.